여성운동가·민주투사·퍼스트레이디…파란만장한 삶
가부장제 여성 권익신장 선봉
DJ 아내이자 후견인·조언자
한평생 남북화해 위해 온 힘
입력시간 : 2019. 06.12. 00:00


이희호 여사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들의 권익신장에 앞장선 1세대 여성운동가였고, 정치인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아내이자 동지로서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투사의 길을 함께 걸었다.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남편의 곁을 지키며 내조자를 넘어 때론 후견인으로, 때론 조언자로, 고난과 시련을 함께 이겨냈다.

◆여성운동 앞장선 엘리트 여성

고인은 1922년 의사였던 아버지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 사이에서 6남2녀 중 넷째이자 맏딸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고인은 일제 치하에서 이화고등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를 다녔다.

1946년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한 고인은 대학시절 남녀평등에 관심이 많아 여성권리찾기 운동에 앞장섰다. 졸업한 뒤에는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져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했다. 그 와중에도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어 여성운동을 했다.

또 여성문제연구원을 창립, 여성인권 신장과 남녀차별 철폐운동에 몰두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서른 여섯이던 1958년 귀국해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강사생활을 하던 고인은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총무를 맡아 여성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DJ와의 운명적 결혼

독신의 여성운동가이던 고인의 삶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정치인 DJ와의 운명적인 결혼이었다. DJ와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처음 만났다. 잇따라 출마한 선거에서 연거푸 낙마한데다 부인과 사별해 상심이 컸던 ‘정치 낭인’ DJ를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2년 남편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결혼 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박정희 독재의 서슬 퍼런 탄압이 남편 DJ에게 집중됐기 때문이다. 결혼 열흘 만에 DJ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된 것은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후 의문의 교통사고(1971년), 미국 망명(1972년), 납치(1973년), 가택연금과 투옥(1973∼1979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1980년), 미국 망명과 가택연금(1982∼1987년) 등 군사정권 내내 감시와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

1997년 DJ가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고인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청와대에 입성한 후에도 고인은 아동과 여성 인권에 각별한 관심을 두는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결식아동지원을 위한 ‘사랑의 친구들’ 창립, ‘한국여성재단’ 발족,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 장차관 수가 크게 늘고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된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한 것도 바로 고인의 노력이 깃든 결과물이다.

특히 고인은 대통령 없이 홀로 해외 순방을 가고 유엔 아동특별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할 정도로 누구보다도 적극적인 퍼스트레이디였다.

◆영원한 DJ의 동지

고인은 DJ 퇴임 후에도 김대중도서관 개관 등 공식석상에 늘 남편과 함께였다. 2009년 8월 DJ가 서거하자 “남편이 추구해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원한다”며 햇볕정책의 계승자로서 남편의 유업을 이어가겠다는 각오를 피력하기도 했다.

2009년9월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취임한 고인은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었다. 2011년12월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조문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고, 2015년8월에는 90세가 넘는 고령에도 방북할 정도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김대우기자 ksh430@sr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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