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있는 분들, 밑바닥 분에게 공감과 웃음을 선사하고 싶습니다”
“노래를 하면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 내게는 노래 밖에 없다. 상처있는 분들, 밑바닥 분들과 공감할 수 있는 노래다. 성공하고 명예나 돈을 지닌 분들보다 밑바닥 분들이 공감하고 웃고 울 수 있는 노래가 제가 지향하는 바고 앞으로도 그런 노래를 하고 싶다.”
‘영혼을 노래하는 가수’ 이정미(61)씨가 최근 광주를 다시 찾았다.
일본 구니타치 음대 성악과 출신의 그녀가 서른이 넘어 어느 날 갑자기 가수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일본이 주무대지만 제주 4·3이나 제주 강정마을, 광주 5·18민주화운동 기념 무대 등 외롭고 아픈 이들의 무대에는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이번 방문은 전남대 호남학연구원이 학술대회 특별공연으로 마련한 콘서트를 위한 길이다. 독창적 음색과 노랫말로 깊은 울림을 자아내는 이정미의 음악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노래는 내 인생
“노래를 멀리하려고 해도 멀리할 수가 없었다”
이정미씨에게 노래는 그런 존재다.
유년시절 마냥 노래가 좋아서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막연히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철이 들면서 일본인이 아닌 재일 한국인으로 가수가 되기는 어렵구나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다른 길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길을 찾고 싶었다. 그 마음이 갈수록 커졌다.
그렇게 선택한 길이 오페라였다. 일본 구니타치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오페라는 그녀에게 두가지 가능성을 상징했다. 하나는 일본인이 아니라도 실력으로 성공할 수 있겠다는 정면승부의 길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이라는 밑바닥을 탈출해 상류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 대중들과 ‘이정미풍’이라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대중가요를 부르며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이 자리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다.
삶을 지탱해주는, 세상을 향한 창
일본에서만 연 100회가 넘는 라이브 공연을 할 정도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그녀지만 그녀가 대중들과 마주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제주가 고향인 그의 조부는 일제강점기에 먹고 살기위해 일본행을 택했다. 밑바닥 식민지 백성이 살길이란 막막했고 6남매를 둔 부모님 대에 이르러서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물상집 딸 이정미씨는 자신의 가난이, 주변의 보이지 않는 차별이 뼈에 사무치도록 싫었다. 그런 그녀를 지탱해준 유일한 친구가 노래, 음악이었다.
이정미씨는 “조선학교 중학교시절부터 가야금과 해금 등 전통악기를 공부했는데 얼마나 좋은지 새벽 5시에 학교 가서 연습을 했어요. 하루 종일 연습을 해도 피곤한 줄을 몰랐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고등학교시절 음악선생님의 목소리를 살리라는 권유에 서양음악을 섭력하던 그녀는 성악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선학교가 졸업인정이 안돼 도쿄공립야간학교에서 학력인증을 받아 음악대학에 진학했다.
“오페라를 처음 들어보지만 음색을 만들어내고 음역을 소화해내는 것이 그토록 좋을 수가 없었다”는 이정미씨는 “오페라라면 국적이 상관없을 듯하고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을 듯했다”고 덧붙였다.
얼마나 연습에만 골몰했든지 가족과 연이 끊어질 정도였다. 아픈 엄마 병문안도 못해 엄마가 돌아가시며 딸의 면회를 거절할 지경이었다.
위문공연과 한국유학의 좌절
마냥 노래가 좋았던 어린 이정미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위문공연 무대에 올랐다. 이러저러한 조선인 돕기 행사장이었다. 대학 1학년때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한국으로 유학간 학생들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dlef 유학생을 돕는 공연에 나서 노래를 했다. 당시 교포사회에서는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사람뿐 아니라 한국 민주화세력을 돕는 행사도 많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린 이정미는 이들 무대의 단골이었다. 이같은 인연으로 김민기의 음악 13곡을 모은 카세트 음반 ‘김민기를 부른다’를 내기도 했다.
“당시에는 무서운 줄도 몰랐어요. 힘든 사람들에게 내 노래가 도움이 되는구나, 힘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지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나 이정미씨의 선한 의지는 이후 이씨의 삶의 행로에 장애가된다.
성악을 공부하며 한국전통음악과의 비교연구를 하고 싶었으나 당시 분위기상 한국 입국자체가 어려웠고 한국 유학을 포기해야했다.
한 시인과의 만남, 노래를 불러내고
“노래를 해야겠다는 열망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토록 노래가 좋고 희망이었지만 아프고 여린 이정미씨는 섣불리 노래를 할 수 없었다. 대학졸업 후 전공을 살리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무엇보다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두려웠다. 위축된 마음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기적처럼 한 만남이 주어졌다.
야마오샨세이. 야쿠시마를 무대로 활동하는 일본의 대표적 생태주의 시인과의 조우. 한 모임에서 그가 낭송하는 시 ‘기도’를 들었다.
이정미씨는 “시를 듣는 순간 제 자신의 깊은 곳에 있는 기도를 나타내고 싶다는 마음이 순간적으로 복받쳐 올랐다”며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 시를 노래로 불러도 되겠느냐고 여쭸다‘고 말한다.
그때 야마오샨세이가 들려준 한마디. “세상의 모든 우주만물에는 그만의 소중함, 신(가미)이 들어 있어요, 이정미씨에게도 신(가미)이 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안에 가미가 있다면 저 또한 귀한 존재이고 사랑스런 존재구나라는 벅찬 느낌이 들었다”는 그녀는 “아 노래를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혼자 아이를 키우며 도교공립야간고등학교에서 한국어 교사를 하며 가외로 고층빌딩 유리창을 닦던 시절이었다. 고층빌딩 작업을 하며 시는 노래가 되었고 어느날 ‘기도’를 불렀더니 여기저기서 초청이 이어졌다.
이후 작사작곡한 노래들을 세상에 선보인다. 도쿄와 오키나와 등 일본 전역에서 그녀를 찾는 무대가 이어지고 그녀의 팬클럽들이 일본을 순회하고 있다.
일상을 담아낸 울림 깊은 가사와 성악과 전통음악을 섭렵한 그녀의 독창적 곡조, 범접불가한 그녀의 음색이 더해져 관객은 깊은 위로를 받는다.
앞으로도 상업적인 노래는 하고 싶지 않다는 그녀는 “아케다 유미코, 사쿠마 준페이 같은 빼어난 음악인들이 함께해주고 새 음반과 공연을 기다려주시는 분들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며 “정성으로 함께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감사한 마음으로 노래를 계속하겠다”고 말한다.
음반으로는 ‘새야 새야’, ‘김민기를 부른다’(1986), ‘나는 노래하네’(1997), ‘어기야 디야’(2003) ‘지금 여기에 있어요’(2008)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과거 자신처럼 힘든 시기에 있는 이들에게 한마디 들려달라고 했다.
“자신을 옥죄는 강박에서 벗어나야합니다. 그럴 기회가 오면 반드시 놓치지 말고 강박에서 벗어나세요.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고 그러면 세상이 더 밝아지고 행복해집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노력해보세요.”
글=조덕진기자, 사진=오세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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