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종 박사의 고고학 산책

시대를 초월한 감동의 공간들

입력 2021.11.02. 15:47 김혜진 기자
조현종박사의 고고학산책 26<완>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세기의 발견'…사후세계 결과물
악기·음색·복장 이국적인 석조각
규모 형상 압도적 유적 유물 감탄
피라미드형 정방형 분구 세계 최대

조현종박사의 고고학산책 26<완>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병마용갱 1호의 전시광경(1974년부터 발굴), 진시황제릉박물원 사진.

죽은 뒤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믿음은 인류의 오래된 생각이었다. 그것은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으며 중국이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에서도 불편함이 없이 살도록 식량과 여러 도구를 무덤에 넣었다. 고고학자들이 세계 각지의 무덤에서 발굴한 풍부한 부장품들은 죽음 저편에 멋진 세계가 있다는 믿음의 상징물이다. 세기의 발견으로 알려진 중국 서안(西安)의 병마용갱(兵馬俑坑)도 진시황이 믿었던 사후세계의 결과물이다.

2012년 10월, 나는 중국인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도시 서안을 방문하였다. 중국의 서쪽 변경인 서안은 중국 본토와는 사뭇 다른 지역임을 실감케 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카라반의 모습을 새긴 거대한 석조각이었다. 짐을 가득 실은 낙타를 끌고 방금 도착한 듯한 덥수룩한 수염의 서역 상인들이 길게 열 지어 있었다. 둘레에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한다. 악기의 생김새나 음색, 사람들의 복장은 이국적이었다. 서역인 또는 회족(回族)임이 분명하다. 이곳은 서역길의 시작이며 종착지임을 상징하는 '실크로드 기념공원'이다. 실크로드는 서안을 출발하여 돈황을 거쳐 투르판과 카슈가르 등으로 이어진다.

서안은 3천 년이 훨씬 넘는 도시로 1100여 년 이상 13개 왕조의 도읍지였다. 신석기시대의 반파(半坡)유적을 필두로 전국시대의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한(漢)과 당(唐)의 궁전과 왕릉, 성곽, 대안탑을 비롯한 유적과 유물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역시 진시황릉과 병마용갱. 그 규모와 형상은 압도적이며 상상을 초월한다.

복원된 청동전차(1980년 발굴),진시황제릉박물원 사진.

진시황은 기원전 259년에 태어나 13세에 진나라의 왕이 되었다.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황제이며 기원전 210년에 죽었다. 진나라는 서쪽을 방어하면서 통일제국의 기초를 쌓았으며 서안(함양)은 진의 수도였다.

그는 즉위하면서부터 불멸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능묘를 건설했다. 함양성이 살아 있는 진시황의 도읍이었다면 사후세계의 도읍은 진시황릉이었다. 진시황릉은 여산(驪山) 북쪽에 위치한다. 피라미드형의 정방형 분구묘이고 봉분은 동서 345m, 남북 350m, 높이 52.5m 정도로 세계 최대이며 봉분 주위에는 2중의 판축벽이 돌려지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은 지하의 수맥을 3번 관통할 정도로 깊이 파고, 구리판으로 덮은 관과 부장품을 넣은 무덤곽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1974년, 농부 양지발(楊志發)이 발견하였다는 병마용갱은 진시황릉에서 1㎞ 가량 떨어져 있다. 그전에도 병사모양의 흙 인형이나 벽돌, 그릇 등 여러 가지 유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사람들은 벽돌은 담장으로, 흙 인형은 밀짚모자를 씌워 허수아비로 사용했다. 양지발은 문화대혁명의 어수선한 상태에서 발견한 조각들을 리어카에 싣고 박물관에 신고했다. 그리고 1년 뒤 그것은 진시황의 병마용임이 밝혀졌다. 그 공로로 30위안을 받았는데 당시 농민의 3년간 임금에 상당한 큰 금액이었다. 나아가 위대한 병마용의 발견자로서 관람객이 구입한 박물관도록에 서명을 해주기도 하고 명예관장으로 위촉되는 대우도 받았다.

채색이 선명한 도용의 출토모습, 진시황제릉박물원 사진.

병마용갱은 길이 230m, 너비 62m 정도이며 모두 4개의 구덩이로 이뤄졌다. 가장 큰 1호갱은 보병부대이다. 실제 돔으로 덮인 비행기 격납고 같은 유적현장에 서면 전진하는 병사들의 발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는 것 같다. 2호갱은 전차 및 중장보병, 3호갱은 장교로 구성된 지휘부이고 4호갱은 비어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즈음 진시황이 사망한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갱 안에는 수천의 병사와 말이 전차와 더불어 대오를 이루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병마용은 갑옷으로 무장한 전사 등 보병 8천 명과 말 500마리 가량이며, 전차 200량과 곡예사, 악사 등도 출토되었다. 1987년에는 진시황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발굴과 복원작업은 계속되고 있으며 2000년에는 황제릉의 6호갱에서 문관용이, 동북부에서 청동학과 백조, 기러기 등이 배치된 7호갱이 조사되었다.

출토된 병사들의 평균키는 180㎝, 상체는 비어있고 두상과 팔다리는 따로 만들어 조립하였다. 매우 사실적인 얼굴과 머리모양도 따로 제작하여 붙였으며, 가마에서 구워낸 뒤 채색과 옻칠을 입혀 마무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인물들의 얼굴 모습이나 표정, 머리모양, 옷차림, 신발, 품새 등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이나 역할과 같이 당시의 문화와 군사 체제, 사회상황을 읽어낼 수 있는 코드이다.

병사들의 다양한 얼굴들.

당시 진시황의 군대에는 중원 출신 외에 서역과 유럽계 등 외국인이 섞인 다국적군이었다는 사실이 병사들의 얼굴이나 인골의 DNA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이점은 그가 인재 등용에서도 자국민에 국한하지 않고 타국의 유능한 인재를 초빙하여 부국강병을 모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결국 변방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한편 전사들은 원래 창과 검, 활 등의 다양한 청동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무기들은 2천년이 넘도록 매몰되었지만, 박물관의 창검들은 여전히 녹슬지 않고 선명하다. 현지의 박물관을 비롯한 해석은 기원전 3세기경에 이미 크롬도금 기술로 녹을 방지하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2019년, 녹슬지 않는 청동무기의 날카로운 칼날은 놀랍게도 크롬도금이 아니라 옻칠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같은 시기, 전남 화순 대곡리의 청동검(국보 143호)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동검들에도 옻칠이 사용되었다. 뛰어난 접착제이며 광택제일 뿐 아니라 부식을 막는 천연재료, 이른바 옻칠의 마력(魔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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