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임진왜란부터 한말 의병전쟁까지 빛나는 대일항전

입력 2023.11.26. 18:44 이관우 기자
⑫나주 수성 최씨 문중
집안이 나서 日군과 치열한 전투
대한제국 군대 해산 후 거병 계획
최택현과 문중 20여명 참여·활동
석정리, 영산포 주둔한 日군 공격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나주시 다시면 동곡리 동촌마을 전경. 이 마을에서 최씨 문중 20여 명이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남도 의병' 발자취를 추적하다 ⑫나주 수성 최씨 문중

마한의 중심이자 임진 의병, 한말 의병의 중심지가 나주였다. 나주는 고려 시대 나주목이라 해 전주목과 함께 전라도의 명칭 기원이 됐던 고을이었다.

지금도 나주의 슬로건은 '목사골 천년'이다. 물론 필자는 목사골 천년에 거부감도 있다.

'마한 왕도(王都), 2천년'이라는 나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있는데도 말이다. 목사골 천년이 강조되면 그 이전의 나주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몇년 전 전남도에서 '남도의병 역사공원' 건립 후보지를 공모하자 지자체 몇군데가 지원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그것을 물었을 때 의병공원은 당연히 나주가 돼야 함을 이야기했다.

나주는 남도 의병의 선구인 김천일 의병장이 이끄는 나주 의병과 그 나주 의병의 전통을 계승한 한말 나주 의병이 의병전쟁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역사는 기록자의 주관이 작용한다. 우리가 역사를 읽을 때 기록자가 처한 상황을 알아야 역사의 진실에 다가설 수 있다.

나주 의병의 상징인 김천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대표적 예이다. 진주성을 사수하다 남강에 투신한 김천일을 당시 남인으로 전쟁을 지휘한 유성룡은 공성(空城) 작전을 펼친 조정의 명령을 어겼다고 해 평가를 박하게 했다.

반면 김천일과 같은 서인 출신인 보성 출신 대학자 박광전은 그의 진주성 사수 작전이 호남을 지키는 원동력이었다고 했다.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은 이항복은 김천일의 진주성 전투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1896년 2월 초 장성에서 이동해 온 기우만 등 장성 의병과 합류한 나주 의병이 최초로 거병을 고한 곳이 김천일의 사당이다. 임진 나주 의병이 이후 남도 의병의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의 충의비(오른쪽)와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고 목숨을 끊은 나주 임씨의 충절을 기리는 실적비(왼쪽).

임진왜란기에 활동한 나주 의병은 김천일 외에도 그 이름 셀 수 없다. 이 가운데 다시지역에 세거하며 세력을 형성했던 수성 최씨 가문이 단연 돋보인다.

수성 최씨 가문 가운데 최낙궁의 다섯 아들 모두 임진, 정유 전쟁에 빛나는 활약을 했다.

문과에 급제해 좌랑직에 올랐던 희열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 권율 장군을 도왔고 둘째 희윤은 기효증 의병장, 셋째 희급과 넷째 희민과 희급의 아들 진은 김천일 의병장과 함께했다.

막내인 희량은 무과 급제 후 정유재란 때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을 도와 7전 전승의 빛나는 기록을 세웠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낙향했다. 훗날 희량은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됐다. 시호는 무숙이었다.

나주는 일제가 거괴(巨魁)라고 칭했던 김태원, 김율 형제를 비롯해 박사화, 박민홍·박여홍 형제, 권영회, 조정인 등 이름 석자만 이야기해도 알 수 있는 의병들이 많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지만, 임진 전쟁을 빛냈던 수성 최씨의 의로운 정신은 한말 의병에 그대로 이어졌다.

같은 동리 한 문중이 중심이 돼 의병부대를 결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공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조직의 귀재 구례 출신 유병기 의병장은 김태원 의병장을 만나 의병부대 결성을 의논했다.

1907년 8월 1일 해산된 대한제국 병사들이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부대의 사기가 크게 고양됐고, 의병 부대가 전국에서 들불처럼 조직되고 있었다.

장성 유학자인 기삼연은 영광, 나주, 함평, 담양, 화순 등 지역 의병 지도자들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했다. 이때 김태원, 심남일 등 많은 의병 지도자들이 의진을 구성해 합류했다. 연합의진이 결성된 것이다.

이 무렵 나주에서도 지사들이 의병부대를 자발적으로 구성해 서로 합진을 구성했다. 송석래 의병장도 고향을 중심으로 의진을 구성해 김태원 의진과 합진을 형성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 어등산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 무렵 송석래 의병장이 거병한 곳과 가까운 곳의 다시면 동곡리 동촌마을의 수성 최씨 문중들도 거병을 계획했다. 이들의 중심에 최택현이 있었다.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나주시 다시면 동곡리에 세워져 있다. 사진은 4인 중 한 명인 최택현 의병장의 후손인 최영진(왼쪽)씨가 기념비를 설명하고 있는 모습.

지난 19일 최택현이 의진을 결성한 마을을 후손 최영진 선생과 함께 찾았다. 1859년생으로 당시 50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종형인 최광현, 종제 최병현, 아들인 윤용과 함께 의병을 규합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수성 최씨 문중 2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이들이 조직한 의병부대는 김태원 의진과도 연계가 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한 마을의 한 문중이 의병부대를 결성한 예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이들의 의진 결성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이들은 마을과 가까운 학교 석정리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와 영산포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부대를 공격했다. 일본군 가까이 있는 수성 최씨 문중 의병부대의 존재는 일본군에게는 위협적이었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최택현 의진은 용전분투했다. 최택현과 종형제, 그리고 그의 아들 모두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광현 55세, 택현 48세, 병현 47세, 윤용 26세였다.

이들을 포함해 다른 의병들도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을 것이다. 1909년 8월이었다.

현재 밝혀지지 않은 이들의 신원을 찾아야 비로소 동곡 수성 최씨 문중 중심 의병부대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의병부대 결성 과정에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일본군과 전투를 몇 차례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최윤용의 아내 나주 임씨는 남편과 시아버지가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애도했다. 그리고 돌을 껴안고 우물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현재 나주 다시 동곡에는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수성 최씨 4인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91년에 세워진 것인데, 전남대 국사교육과 송정현 교수가 찬한 '충의사'라는 제목의 비문이었다.

이들 4명은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됐다. 그리고 비석 옆에 목숨을 끊은 나주 임씨의 충절을 기리는 '열부(烈婦) 나주 임씨 실적비'가 함께 세워져 있다.

필자는 이번 미서훈 용역 작업을 하면서 남도 의병 795명의 명단을 확인했다. 일본군 전투 기록과 당시 수형자 명부 등에서 확인한 것들이다. 불과 1년 남짓 작업해 찾아낸 것이다.

필자는 이들의 역사를 차분히 복원하여 역사적 평가를 받게 하려고 한다. 동곡마을의 수성 최씨 의병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등산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김태원 의진의 상당수 의병들의 이름을 아직 모르고 있다.

이들을 찾는 데 우리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전남도가 추진한 미서훈 독립유공자 발굴 작업에 기업들까지 참여해 홍보에 나섰다고 한다. 총괄 책임자인 필자에게, 또는 전남도를 통해 필자에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다.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공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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