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이 만난 사람

[조영석이 만난 사람①] 하상용 이사장

입력 2021.03.11. 17:50
빅마트 대표에서 창업전도사가 되어 돌아온 (사)창업지원네트워크 하상용 이사장
“벤처기업 성공과 좌절, 재도전…나의 삶 자체가 창업 지침서”
광주지역 최초 창고형 할인점 '빅마트' 란 벤처기업으로 성공 후 좌절, 재도전의 길을 걷고 있는 하상용 (사)창업지원네트워크 이사장이 무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통업 종사 경험을 살려 청년창업자 대상 '기업가 정신' 특강과 공유문화 및 재능나눔으로 청년들의 성공창업을 응원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오세옥기자 dkoso@srb.co.kr

빅마트, 지역민 사랑 속에 성장

무리한 매장 확대 결국 파산으로

인생1막 실패가 2막 든든한 자산

실패 겪는 이들에 도움 되고 싶어

'다시 일어설 용기만 있다면' 펴내

"이웃이 잘 살아야 기업도 성장·발전

사회공헌활동은 책임이나 의무 아닌

경영활동 한 축, 덧셈 방정식돼야"

파산 이후 재능기부센터와 인연

재능 공유로 '함께'의 가치 배워

지역청년 창업성공 응원이 일상

온가족 함께 '로컬푸드빅마트' 운영

'하상용이 있어 좋았다' 평가 듣길


그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자본금 5,000만원으로 광주 남구 주월동에 '빅마트'라는 창고형 대형 할인마트를 열었던 1995년도를 말한다.

광주에서 첫 선을 보인 대형할인매장 빅마트는 문을 열자마자 지역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다. 광주시민들은 '빅마트를 가 본 사람'과 '가 보지 않은 사람'으로 나뉠 정도였다. 지역민의 사랑 속에 빅마트는 경이적 성장을 이뤘다. 창업 10년만에 매출 2,000여억 원, 종업원 3,000여명, 협력업체 1,000여 곳을 두었다. 이때 빅마트는 전국 할인점 순위 7위였다.

하지만 중국의 심양까지 진출했던 향토기업 빅마트는 어느 날 꽃이 지듯 그렇게 사라졌다. 이마트와 롯데마트 등 대기업의 잇따른 출점과 무리한 사업 확장에 따른 자금난이 핵심 원인이었다. 빅마트는 2007년 롯데수퍼로 간판이 바뀌면서 '법정관리'와 '청산'의 수순을 밟은 끝에 2012년 막을 내렸다.

하상용 전 빅마트 대표가 창업전도사가 되어 돌아왔다. 광주 재능기부센타 대표도 맡고 있다. 빅마트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이지만 친환경 식품매장인 '로컬푸드빅마트'도 운영 중이다.

추락의 아픔을 딛고 새롭게 일어나, 같으면서도 달라진 시간 속에서 인생 2막을 걷고 있는 그를 만났다.


- '빅마트, 그 이후'라는 부재의 '다시 일어설 용기만 있다면'이라는 책을 펴냈다. 책을 낸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빅마트는 기업적인 측면은 물론 사회적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혁신과 기여를 했고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직원들의 헌신적인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비록 회사는 문을 닫았지만 그들의 열정만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두 번째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심어주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들이 내 얘기를 듣고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벗어나 새롭게 일어서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사업 실패 후 물질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으로 다른 이를 도울 수 있는 플랫폼을 만났다. 재능기부센터다. 광주재능기부센터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청년들의 창업에 관심을 갖게 되더라. 그 연장선에서 창업멘토 역할도 하고 있다. 또 강연도 자주 나간다. 우리지역의 친환경 식품을 위주로 파는 '로컬푸드빅마트'도 가족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실패한 듯 보였던 인생 1막이 자산이 되어 인생 2막을 열심히 살고 있다"


- 인생 2막은 인터뷰 2막에서 듣기로 하고, 빅마트 시절로 돌아가 보자. '빅마트' 임직원들이 입었던 '청바지와 빨간조끼'는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청바지를 입고 출근하여 상의에 조끼만 걸치면 근무복이 완성되는 패션은 당시 파격적이었다. 직원들에게는 의복 마련의 부담을 줄여주고, 회사로서는 근무복 제작비를 줄여줌과 동시에 고객들에게는 빅마트의 상징적 이미지가 될 수 있었다. 일석삼조(一石三鳥)가 아니었나 싶다. 빅마트의 '청바지와 빨간 조끼'가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의 '청바지에 터틀넥' 패션보다 더 앞섰고, 색상 조화도 더 멋있는데 패션계에서는 알아주는 않는 것 같다.(웃음)"


- '빅마트가 기업적 측면이나 사회적 측면에서 적잖은 혁신과 기여를 했다'고 술회했다. 어떤 혁신과 기여를 말하는가.

"유통업계 최초로 계산원을 주부사원으로 바꾼 것이나 고령의 어르신들에게 맞는 '실버 주차도우미' 제도시행, 장애인 채용 확대 등은 국내 굴지의 대형 업체들과 일반 기업에서 뒤따라 도입할 만큼 선도적이었다. 저마다 잘 할 수 있는 맞춤형 일자리 창출이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일자리는 생존의 문제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이지 않는가. 장애인이라 하여, 나이든 어르신이라 하여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방이 베푸는 시혜의 측면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일자리를 통해 생존과 자존감을 회복했고, 회사는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결국은 '윈(Win)-윈(Win)' 의 '같이 사는 세상'을 향한 작은 발걸음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 많은 광주시민들은 진월동 빅마트 본점에 설치됐던 폐쇼핑봉투로 만든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빅마트는 환경운동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지금은 보편화 된 쇼핑봉투 유료화는 1998년 빅마트가 전국 최초로 시행했다. 회수된 봉투를 재활용하자는 취지였는데 소비자가 가져온 봉투는 50원을 환불해주고, 팔 때는 30원을 받았다.

회사에서도 새롭게 제작할 물량이 줄어들어 월 600만 원 가량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이윤을 남기자고 시작했던 일이 아닌 만큼 절감된 비용 전액은 어르신 대상 무료 급식소인 '사랑의 식당'이나 환경운동단체 등에 기부됐다.

시민들은 '환경보호'라는 취지에 적극 호응해 주었고, '다른 사람이 다시 사용해야 한다'며 사용한 봉투를 깨끗하게 씻어 되가져올 정도였다."

이후 빅마트는 수차례 반복 사용하여 폐기처분해야 할 쇼핑봉투를 이용한 세계 유일의 쇼핑봉투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 환경운동의 중요성을 일깨우기도 했다.

빅마트는 이를 계기로 1998년부터 매년 '어린이 환경 미술제'를 개최하고 어린이들의 수상작품으로 달력을 만들어 고객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어린이 미술 대회'는 빅마트의 후신인 '로컬푸드빅마트'가 이어받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상용 (사)창업지원네트워크 이사장이 무등일보 조영석 시민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다.

- 빅마트는 크고 작은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했던 것으로 안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에 있다. 하지만 그 이윤은 고객인 소비자로부터 나오고, 소비자는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이지 않는가. 이웃이 잘 살아야 기업도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객인 이웃은 기업의 임직원은 아니지만 기업의 원천이다. 때문에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은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라 경영활동의 한 축임과 동시에 뺄셈(-)이 아닌 덧셈(+)의 방정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럼에도 빅마트가 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기업의 잇따른 출점과 무리한 사업 확장에 따른 자금난'은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버린 것 아닌가.

"진월동 본점을 이전, 빅시티를 오픈한 것을 시작으로 2006년 한 해에만 4개의 매장을 잇따라 개장한 것이 무리수였다. '국내 유통업은 결국 2~3군데 회사가 독점할 것이고 조만간 있을 대기업의 인수합병에 대비해 덩치를 키워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다른 한 원인은 이런 어리석은 판단을 견제할 내부시스템이 없었다는 점이다. 창업 초기에는 유통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임직원들이 여러 명이 있어서 회사의 중요한 결정은 집단지성을 통해 이뤄졌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창업 멤버들이 하나 둘 떠나게 되자 내가 회사에서 유통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때는 몰랐지만 그 것은 비극의 서막이었다."


- 기업이 파산하게 될 것 같으면 경영자가 이를 대비하여 장롱 속에 재산을 미리 숨겨둔 뒤에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나.

"나는 망하더라도 협력업체는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납품 대금이 1천만 원 이상인 협력업체들에게 최후까지 남아 있던 진월동 본점을 대상으로 20억원 가량의 담보 설정을 미리 해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변호사가 '뭐 할라고 그러느냐'며 '미친 짓'이라고 하더라. 경리팀장이 '차라리 어디로 도망가라'고도 했지만 아내가 '무슨 말이냐. 힘내서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해보자'해서 도망가지 않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 빅마트 파산 후 재기까지 쉽지 않는 시간이었을 것 같다.

"2012년 10월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수중엔 한 칸의 사글세를 낼만한 돈도 없었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월의 낙엽이 내 신세였다. 그 참담한 패배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길을 걷다 빅마트 시절 기름을 납품하던 주유소를 보게 됐는데 2층이 비워있는 것 같았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사장님께 사정을 얘기하여 "언제까지나 마음 편히 이용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67평 아파트에서 살다 주유소 2층 15평 남짓한 직원휴게소로 이사 왔지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그렇게 3년을 살았다."


- 인생 2막에 대해 들어 볼 시간이 된 것 같다. 강연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고 했는데.

"청년창업자를 대상으로 기업가 정신 특강도 하고, 공유문화와 재능나눔의 강의도 자주 한다. 유통업에 종사했던 경험을 살려 소상공인과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농산물 유통과 마케팅 강의도 하는데 한 달 평균 7~8회 정도는 하는 것 같다.

지역 최초의 창고형 할인점이라는 벤처기업을 성공시키고, 또 좌절했고, 그리고 다시 재도전의 길을 가고 있는 나의 삶 자체가 후배 창업자들에게 최적의 참고서가 될 수 있겠다는 믿음에서 어디든지 달려가고 있다."


- 광주재능기부센터와 (사)창업지원네트워크에서 하는 일은.

"빅마트 파산 후 재능기부센터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곳에서 세상에는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많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모아진 재능들을 어려운 이웃들과 공유하며 '함께'라는 가치를 배워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창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은 지역 청년 창업자들의 성공창업을 응원하는 삶이 일상이 됐다.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재능과 분야가 이러한 창업 멘토링이 아닐까 한다."

지역 청년 창업자들을 위해 개설한 카카오톡 '광주전남창업넷' 단톡방에는 750여명의 예비 창업자들이 참여해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 친환경 식품매장인 '로컬푸드빅마트'를 가족회사로 운영하고 있다. 양에 차는가.

"빅마트와 비교를 의미하는가. 매장 규모와 취급 품목 수의 비교가 아니라면 과분할 만큼 양에 차고 넘친다. 큰 딸 정윤이가 대표로 되어 있다. 빅마트 법정관리를 앞두고 내게 '우리 가족끼리 모여서 포장마차라도 해요'라며 용기를 주었던 딸이다. 둘째 경훈, 세째 도훈이 등 삼남매가 '삼남매 고깃간'을 운영하는데 나보다 더 잘한다. 아내 정지영은 매장을 관리와 판매를 담당하고 있다. 아빠가 사고를 크게 치면 아이들이 빨리 철든다(웃음).

주변에서 가족과 함께 운영하는 모습을 보고 '행복 하겠다'고 한다. '100% 그 이상 동의한다'는 말로 질문에 대신하고 싶다."

빅마트를 계승하고 친환경의 의미를 더한 '로컬푸드빅마트'는 현재 4곳의 가맹점과 3개의 온라인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은가.

"가족과 소비자, 창업자들에게 '하상용이 있어 좋았다'라는 평가를 들으면 괜찮을 것 같다."

[인터뷰를 마치며] 인터뷰 내내 그의 얼굴에는 넉넉한 미소가 가득 피었고, 질문에는 막힘이 없었다. 막힘없음은 꾸밈없음으로 어어졌고, 단어는 평이했으나 단어와 단어가 이어지자 말은 웅숭깊게 흘렀다.

빅마트 파산이 그의 삶에 실패인가 성공인가 가늠키 어려웠다. 다만 빅마트의 파산을 겪지 않았다면 인터뷰할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의 희망처럼 '괜찮은 사람'에 동의하고 싶었다. 물론 '괜찮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의 상위 개념이라는 전제다. 조영석(kanjoys@hanmail.net) 시민기자

조영석

오랜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예순을 넘어서자 적들이 가여워 졌다. 대신 젊은 시절 가여웠던, 이를테면 풀이나 참새 같은 그런 나약한 생명들이 경외로워졌다. 자신의 고향인 진도군 조도가 대한민국을 대양으로 이끄는 예인선이라고 우기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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