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칼럼] '길'이 사람 사는 곳이다.

@김기호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행정중심복합도시 총괄기획가 입력 2024.01.18. 17:57

볼노(Otto Friedrich Bollnow, 1903∼1991, 독일 철학자)는 거주(居住, Wohnen)를 집에 거주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이 공간 속에 존재하고 관계를 가지는 모는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 정의했다(Mensch und Raum(인간과 공간), 277쪽). 이에 따라 그는 거주(Wohnen)의 개념이 적용되는 세 가지 형태의 공간을 구분했다. 몸(신체, Leib)이라는 공간, 집(Haus)이라는 공간, 그리고 모든 외부공간 (der freie Raum)이다(같은 책 286쪽).

우리들도 '집에 거주한다'는 말을 쓴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은 '나는 아파트에 살아'이고 어떤 때는 '나는 OO동네에 살지'하거나 나아가 '나는 OO시에 산다'고도 말한다. 이같이 '산다'는 말과 '거주한다'는 용어는 우리말에서 중첩하여 사용되고 꼭 주거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 공간규모와 형태에 적용된다.

게르하르트 라게(Gerhart Laage, 1925∼2012, 독일 건축교수)는 아예 '거주는 길에서 시작한다(Wohnen beginnt auf der Strasse)'고 주장했다(그의 책 제목, 1977년). 그는 주거를 둘러싸는 주변을 거주환경(Wohnumfeld)이라 부르며 이를 대표하는 것을 '길'로 보았다. 집을 나서며 연결되는 많은 사유(私有) 또는 공공(公共)의 공간과 시설들이 사람들 거주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하고 개선 대안을 제시했다.

여러 가지 이론적 경험적 담론의 전개는 '거주'의 개념을 현재 같이 '주거 내(住居內)'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더 확장하여 도시라는 범위까지도 포괄해야 좀 더 풍부한 삶의 여건이 조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확장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요소는 단연 '길'이다.

길은 매력적인 곳이다. 어디든지 연결하는 힘이 있다. 삶의 모습이 다양하게 드러나고 사람이 오가고 교류하며 친구가 된다. 새 옷을 입거나 좋은 일이 있으면 사람들은 길로 나선다. 은근히 자랑하고 보이고 또 서로 보는 곳이다. 길목이 좋아야 사업도 잘된다. 이미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길의 매력과 힘을 알고 있다. 길에서 교역과 교류를 통하여 사업의 동지와 삶의 반려를 만났으며 삶의 어려움과 고민이 있을 때는 길을 걸었으며 희망과 힐링을 찾아 순례길을 떠났다. 우리도 길의 매력과 마력을 음미하러 잠시 길을 떠나보자.

정동은 서울 도심에서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동네다. 시내에서 회의나 업무 전에 돌담길이나 정동길을 걸으면 내 마음은 잘 정리되고 머리는 상쾌해진다. 회의 후 덕수궁에 들어가 앉으면 숲과 고궁 속에서 잠시 도심을 떠난 것 같은 여유를 즐긴다. 담 하나로 번잡한 도심과 고요한 자연이 이렇게 대비를 이루는 곳은 흔하지 않다. 거기에 역사적 건축물과 미술관은 덤 같지 않은 덤이다.

밤이 되면 똑 같은 도시공간이 마술을 부린다. 봄가을에 열리는 정동야행(夜行, 밤나들이)은 예기치 못한 반전(反轉)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덕수궁 중화전 앞 고궁 음악회의 웅장한 선율 앞에 앉으면 소리와 칠흑같은 공간이 함께 들린다. 주간과 다른 융합과 대비가 등장한다. 궁궐 외 33곳에 있는 정동길의 다양한 장소에서 이런 매직이 이루어진다.

독일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넥카(Neckar) 강변으로 가보자. 성채(城砦)나 역사도심 그리고 대학(5개)등 유명한 장소마다 온 세계의 사람들로 붐빈다. 그곳에서 나의 시선과 발길이 향하는 곳은 강 건너편의 언덕이다. 바로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다. 급격한 경사지로 원래 포도밭들이 있는 곳인데 대학도시답게 대학교수와 철학자들이 산책을 하면서 그 이름을 얻게 되었다. 역사도심에서 옛 다리(Alte Bruecke)를 건너면 바로 연결된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로운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이 길을 오르고 또 걷는다. 인생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새로운 길을 구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마냥 진지하지만은 않다. 오르는 길에 강 건너로 보이는 역사도시와 성채(城砦)의 파노라마는 다시 우리 인생의 시름을 잊게 해준다.

우리 주변에는 이미 이름난 길들이 많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만남과 즐거움을 위해 아직 다양하고 재미있는 길들을 찾고 있다. 꼭 거창한 길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해석이나 의미를 부여한 소소하고 다채로운 길들이 등장한다면 우리 도시는 살고(거주하고) 일하고 놀기 더 좋은 도시(fun city)가 될 것이다. 김기호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행정중심복합도시 총괄기획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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