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대교 건너 5분쯤, 해골산 연상
예술품 조각한듯 우뚝 솟은 바위
금골은 속세 벗어난 부처의 골격
조선 문신 이주, 자세한 풍경 기록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도는 민속의 고향이며, 진돗개로도 유명한 섬이다. 트로트 가수 송가인이 히트치자 지금도 많은 관광객들이 송가인의 고향인 소앵무리(小鸚鵡里)를 찾고 있다.
진도에는 첨찰산(尖察山·485m), 여귀산(女貴山·457m), 지력산(智力山·328m), 동석산(銅錫山·240m), 금골산(金骨山·195m), 남망산(南望山·164m) 등 산세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산들이 많다. 진도를 이루는 산줄기 진도지맥(珍島枝脈)은 진도대교 남단의 망금산과 도암산, 금골산, 고두산, 챙재, 철천산, 선황산, 상봉, 출입봉, 첨찰산, 제봉, 수리봉, 남산, 문마산, 삼막봉, 대학봉, 봉호산, 여귀산, 연대산, 월출산, 희여산, 한복산 등 고만고만한 산과 봉우리들을 지나 진도 남단의 서망항에서 끝을 맺는다.
승용차로 진도대교를 건너, 불과 5분여쯤 지나면 오른쪽으로 마치 해골산을 연상하는 바위산이 우뚝 서있다. 진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금골산이다.

금골산은 높이는 낮지만 정면에서 바라보면 마치 조각가가 바위에 예술작품을 조각해 놓은 것 같다. 수십 길 절벽, 층리를 이룬 곳에 지붕 바위가 마치 동굴처럼 파여 있고, 동굴 안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금골산 정상 부근의 석굴에는 금골산 마애여래좌상(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이 새겨져 있다. 마애불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이 굴속에는 늙은 스님과 상좌한 사람이 살았는데 바위 구멍에서 매일 두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만 나왔고 식객이 더 늘더라도 절대 욕심을 버리고 그 나온 쌀만으로 먹고 살아야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의외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 두 사람분 쌀만 가지고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늙은 중이 화를 내며 '이놈의 구멍은 인정사정도 없더란 말이냐'하면서 더 많은 쌀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쌀구멍을 쑤셨다. 그러나 쌀은 더 나오지 않고 홧김에 쑤신 구멍만 망가지고 그 이후로는 구멍에서 한 톨의 쌀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놀라움과 후회에 잠긴 노승은 상좌와 함께 더 이상 먹을 것이 없는 이곳을 떠나고 말았다고 한다."

금골산 자락에 있는 해언사(海堰寺)는 해원사(海院寺)라고도 불리우며,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기록이 없어 확인하기는 어렵다. 지금의 해언사는 태고종 소속으로 한동안 금골사로 불리어 온 절인데 주지인 지수(智洙) 스님이 옛날 이름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몇 년 전 개칭했다고 한다. 해언사는 옛날 도선국사가 3천800 군데의 사찰을 정할 때 그중 한 곳으로 정한 곳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둔전리 해언사 아래 금성초등학교 내에 있는 금골산 오층석탑(보물 제529호)은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석탑은 단층 받침돌로 위에 5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리고 반구형 돌로 상륜부를 조성한 모습이다. 석탑이 있는 곳에는 해월사(海月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자리로 추정된다. 이 석탑은 백제계 석탑을 계승한 것으로, 1층 몸돌이 지나치게 길고 각 층의 지붕돌이 길고 넓어서 조형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곧 백제계 석탑으로는 가장 남쪽에 건립된 석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조성 시기는 돌을 다듬은 수법이나 각 부분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기로 추정된다.

금골산은 상골산으로 불리워졌으나, 어느땐가 금골산으로 산이름이 불리워졌다고 한다. 금골(金骨)은 귀중한 물건을 뜻하며 속세를 벗어난 고상한 풍채와 골격, 즉 부처의 골격을 의미한다. 금골산의 아름다움은 속동문선 제21권 녹(錄)편에 이주(李胄)가 쓴 금골산록(金骨山錄)에 기록되어져 있다. 속동문선은 1518년(중종 13) 신용개·김전·남곤·최숙생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시문집이다. 23권 11책. 1478년(성종 9)에 나온 서거정의 '동문선' 이후 40년간 발표된 문인들의 시문을 수록했다. 이주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1498년(연산군 4) 정언으로 있다가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 진도로 귀양갔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김굉필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문집으로 '망헌집(忘軒集)'이 전한다.
금골산록에는 금골산의 풍경이 자세하게 기록되어져 있다.

"중봉이 가장 높고 사면이 모두 돌로 되어 바라보면 옥부용(玉芙蓉)과 같다. 서북은 바다에 닿고, 지맥이 구물거리며 남으로 달려 2마장쯤 가서 간점(艮岾)이 되고, 또 동으로 2마장쯤 가서 용장산(龍莊山)이 되어 벽파도(碧波渡)에 이르러 그쳤다. 산의 주위는 모두 30여 리인데, 아래는 큰 절터가 있고 이름은 해원사(海院寺)다. 9층의 석탑이 있고 탑의 서쪽에 황폐한 우물이 있으며, 그 위에 삼굴(三窟)이 있는데 그 맨 밑에 있는 것은 서굴(西窟)이다. …서굴을 경유하여 동으로 올라가자면 길이 극히 위험하다. 비탈을 타고 돌에 굴러서 한치 한치 전진하기를 1마장쯤 가면 석봉(石峯)이 우뚝 솟아 앞에 있는데, 그냥 건너뛸 수 없어 돌을 포개서 13계단의 층층 사다리를 만들었다. 내려다보면 밑바닥이 없어 심목(心目)이 모두 현기증을 일으킨다. 거기를 올라가면 절정이 되고, 절정으로부터 동쪽으로 돌아 내려가기를 30보쯤 가면 마루턱 바위를 파서 오목하게 만들어 발을 붙이고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오목한 군데가 12군데 있는데 거기서 10여보를 내려가면 상굴이 나온다. … 굴 북쪽 비탈을 깎아서 미륵불(彌勒佛)을 만들었는데, 옛날 군수 유호지(柳好池)가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전해 오기를, "이 산이 옛날에는 영검이 많아서 매년마다 방광(放光)을 해서 신기한 점을 보이고, 유행병이나 수한(水旱)의 재앙에도 기도를 드리면 반드시 효과가 나타났는데, 미륵불을 만들어 놓은 뒤부터는 산이 다시 방광한 일이 없었다." …중략.
금골산록은 이주가 1502년 9월 유배지인 진도의 금골산에 23일간 머물 때의 기록이다. 이주는 금골산에 머무르면서 '망헌집'에 '밤에 앉아서(夜坐)' 시를 남겼다. 금골산의 상굴에서 쓴 것으로 보이며 유배지에서의 쓸쓸한 마음이 느껴지는 시이다.
"음산한 바람 불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바다 기운이 산속의 깊은 석굴까지 이르네
이 밤, 덧없는 인생은 흰머리만 남아
등불 켜고 때때로 초년의 마음을 돌아본다"

금골산 산행은 둔전리 금성초등학교에서 시작된다. 교정의 왼쪽에서 서있는 5층 석탑에서 바라본 금골산은 웅장하고 기묘하게 보인다. 해언사의 왼쪽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서 오르면 처음에는 가파른 등산로가 시작된다. 암릉 사이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10여분 쯤 오르면 바로 앞으로 덕병리평야와 군내호가 보인다. 산허리를 감도는 듯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멀리 조도의 가사군도와 신안군의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앞으로 금골산과 한줄기인 도암산이 전기송신탑과 맞물려 어지럽게 보인다. 다시 너럭바위에서 산의 능선쪽으로 오르면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다. 둔전리 마을 사람들이 아침마다 올라다니면서 건강을 챙기는 곳이다. 이곳에서 마애불좌상이 새겨진 굴로 내려가는 오른쪽 절벽 등산로로 접어들면 오금이 저린다. 바로 아래로 금성초등학교 교정과 둔전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철제빔과 와이어로 설치된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10여분쯤 어렵사리 내려가면, 마치 지붕처럼 생긴 굴이 나타난다. 굴의 천정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다. 물의 풍화작용으로 형성된 지형인데 풍화혈(타포니·tafoni)이라고 한다. 천정의 비스듬 한 면에는 마애여래불좌상이 새겨져 있다. 다시 어렵사리 돌계단을 오르면 삼거리다. 북쪽으로는 월출산·흑석산이, 동쪽으로는 주작산·두륜산· 달마산·완도 상왕봉이, 서쪽으로는 양덕도·주지도·가사도·신의도·하의도·장산도·안좌도·팔금도·암태도·자은도가, 남쪽으로는 첨찰산이 다가온다.
정상을 거치고 동북쪽으로 내려가는 암릉길은 위험하다. 철사닥다리를 따라 내려가면 동북쪽에 있는 정자에 도착한다. 전망이 좋지 않은 등산로다. 정상에서 흔들바위를 지나 힘겹게 암릉을 지나면 편한 능선길이 나온다. 능선길에서 10여분 내려가면 고인돌바위다. 정자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삼굴 중의 하나인 동쪽굴을 거치고, 20여분 마을 길을 따라 가면 금성초교가 나온다. 이곳에서 바라본 금골산의 모습이 아름답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멋진 곳에 자리잡은 초등학교일 것이다.

●숙박 및 먹거리
진도 녹진쪽과 해남 우수영쪽에 숙박시설이 많다. 녹진쪽에 진도밤바다횟집 반찬도 맛깔스럽고, 자연산회와 간장게장이 맛이 있다. 주인장이 서망 진도수협위판장에서 중매인으로 있으며 매일 위판한 싱싱한 생선을 공수한다. 펜션도 운영한다.

●볼거리
진도타워
1984년 진도대교의 개통으로 인해 한반도의 최남단 지역이 된 진도는 연간 외국인을 포함하여 약 260만여 명이 찾는 국제적 관광명소가 되었다. 승전광장(진도타워)은 416년 전 이순신 장군을 도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우리 조상과 진도군민들의 훌륭한 호국정신을 계승시키고자 만든 상징물이다.
벽파진 이충무공전첩비(향토유형유산 제5호)
1956년 11월 29일 건립된 이 전첩비는 정유재란 당시 이충무공에 의해 가장 통쾌한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 승전을 기념하면서 진도출신 참전 순절자들을 기록한 전첩비다.
전통남화의 성지, 운림산방
진도 그림의 뿌리이자 한국 남화의 고향이 바로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화의 맥을 잇는다. 허련은 진도 태생으로 이웃 땅인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는데,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추사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용장성(국가지정 사적 제126호)
용장성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진도를 근거지로 관군과 몽고군에 항전했던 성이다. 현재 성의 대부분은 원형이 사라진 상태이며, 성지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고, 성내의 용장사지 및 행궁지가 보존되고 있다.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종의 육촌인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진도로 내려와 항거하는데 고려의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이끈 삼별초군이 대몽항쟁(1270~1271)의 근거지로 삼은 성이다.
신비의바닷길
현대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이곳 신비의바닷길은 1975년 주한 프랑스대사 '피에르 랑디'씨가 진도로 관광을 왔다가 이 현상을 목격하고 프랑스 신문에 소개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뽕할머니의 제사로 시작된 이 축제는 원형 그대로의 민속민요, 남도 들노래, 다시래기, 씻김굿 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와 만가, 북놀이 등 주옥같은 공연이 펼쳐진다.

명량해상케이블카
명량해상케이블카는 해남스테이션을 출발해 울돌목 수면 위를 평균 30m 높이에서 편도 1㎞를 가로질러 진도군 망금산 정상 진도스테이션에서 정차한 후 다시 왕복 운행한다. 탑승 시간은 6분 안팎이며,캐빈은 총 26대로 시간당 2천명이 이용할 수 있다. 케이블카의 운영시간은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8시까지이다.
천기철기자 tkt7777@mdilbo.com
Warning: Invalid argument supplied for foreach() in /home/moodeung/www/inc/inc.detail.How_about.html on line 52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