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예의도 없다, 일본인만도 못하다"
전남방직(전방)·일신방직 매각소식을 접한 문화계 한 인사의 통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 매각에 왜 이토록 가혹한 것일까.
여기에는 이 공장의 연원과 지역민의 애환, 무엇보다 지난 시절 오빠나 남동생 공부를 위해, 부모를 위해 인생을 바쳤던 10대 여성 노동자들, 우리 엄마 할머니 세대의 불같은 삶이 어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간단히 돈벌이로 치부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전남방직 원조는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일인들이 세운 가네보방직이란 면 제조공장이다.
자료에 따르면 이 땅은 전남도 소유였다. 강제수용 등 다양한 착취가 가능한 시절이지만 가네보는 공장 건설과정에 도민들을 위해 공원과 수영장을 짓겠다고 했다. 요즘말로 소위 사회공헌을 다짐했고 실제로 이행도 했다. 지금도 수영장 있는 학교를 보기 어려운데 당시 이들이 운영하던 부속 교육시설에 수영장을 지어 운영했다. 지금 기아타이거즈 야구장이 들어선 곳이 당시 공원터다.
해방 후 가네보가 떠나자 노동자들이 일시 운영하다 미 군정으로 넘어갔고 이후 미 군정이 적산(敵産)기업을 한국인들에게 불하 (拂下) 하는 과정에서 1951년 미군정 통역관 출신 김형남(숭실대 창업자)과 김용주(김무성 전 새누리당 의원 부친)에게 넘어갔다. 이후 전남방직은 일신방직과 전남방직으로 분리됐다.
당시 조선 4대 방직회사 중 하나였던 전남방직은 김용주에게 불하된 후 50년대에는 10대 재벌기업 반열에 들어섰다. 그렇게 성장했지만 지역민들이 전남방직을 호남인의 기업, 광주·전남 기업으로 인식하지 못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일인들 같은 사회공헌은커녕 공장이 둥지를 튼 이 땅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설에 의하면 이름을 '전방'으로 바꾼 것도 경상도 출신인 김용주가 전남방직이란 이름에 어린 호남색을 지우기 위해서 였다고한다. 또 공장은 광주에 두고 본사를 서울로 이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한다.
이곳 가난한 사람들을 값싸게 이용해 돈을 벌면서도 세금은 서울에 내고 광주 전남과 연관성이나 흔적은 지우고 세탁했다는 의심이다. 단지 돈벌이 수단이었을 뿐이었던 것일까. 그게 어찌 출신고향의 문제이겠는가 많은 아득바득 인연을 거부한 행태를 어찌 해석해야할까.
공장인근 지역민들도 번성한 기업을 옆에 둔 보람은 간 곳 없었다. 외려 공장 소음이나 분진 등 고통을 몫으로 강제 받았고 급기야 공장 이전 청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여기에는 개발업자들의 농간과 땅값 상승을 기대한 소시민의 서글픈 욕망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문제는 이곳의 역사적 맥락을 어찌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수년 전부터 이곳을 문화재로 지정 보존해야한다는 경고음이 문화계 내외부에서 울렸다. 이러다 개발업자들에게 팔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호남은행(충장로 5가 옛 조흥은행) 꼴 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이었다. 알다시피 호남은행은 일제강점기 호남 유지들이 지역민들을 위해 만든 광주 최초의 조선인 은행이었지만 포크레인에 밀려 지금은 근본도 없는 건축물이 들어서있다.
부산시와 비교도 됐다. 부산은 고 김수근 건축사 작품으로 알려진 1960년대 건축물 하나도 문화재로 지정한 후 시가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화계가 압박했지만 현실론에 밀렸다. 문화재 지정은 소유주의 동의가 필요한데 '놀랍게도' 전남방직이 동의하지 않았다
소유주가 누구던가. 이 나라 정치·경제 최상위 1%들이다. 김용주·김무성 부자는 한국 정치사에서 유일한 부자 원내대표고 김용주·김창성(김 전 의원의 형)은 역시 유일한 부자 한국경영자총회장이다. 이 일가가 한국사회에 구축한 혼맥까지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다.
문화재 지정 논의가 한 발자욱을 떼지 못하고 있던 중 이들이 놀라운 일을 한 번 더 한다. 광주시에 용도변경을 신청해놓고 개발업자와 매각계약을 체결해 버린 것이다.
다행히 용도변경 절차가 남아있다. 광주시가 부시장을 단장으로 자체 TF도 꾸려 대응에 나섰다니 기대를 해볼만하다. 허나 무엇보다, 천박하게 인간의 삶까지도 돈 몇 푼으로 사고 팔려는 자본에 대한 시민사회의 철저한 대응도 요구된다. 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사람의 생이 거래되는 일이 없도록 반면교사로 삼아야하지 않을까 싶다.
아트플러스 편집장 및 문화체육부국장
- 일상 속 휴식 가능한 건축적 산책 공간 최근 광주광역시건축사회 회원 20여명은 대구 군위에 자리한 사유원 답사를 다녀왔다. 광주광역시 건축사회(회장 정인채) 회원 20여명이 함께 최근 사유원 답사에 다녀왔다.사유원은 대구 군위군에 위치한 곳이다. 광주에서 차로 3시간 정도 달려야 도착 할 수 있는 장소였다. 꽤 먼 거리라 생각하고 나선 길이 무색하게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도착해 있었다. 심리적 거리는 1시간정도 되는 듯 했다.사유원은 대구의 향토기업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모과나무를 수집해 키우던 정원을 '사유를 위한 수목원'으로 조성하고자 승효상 건축가와 함께 오랜 시간 동안 구상하고 준비해, 2021년 9월 정식으로 개관했다.우리는 코르텐강판소재의 정문 '치허문'을 지나, 안내소에 도착했다. 생수 한 병과 답사지의 지도가 담긴 간단한 책자를 들고 '사유원'을 두발로 사유할 준비를 했다. 근래에 계속 된 비도 잠시 쉬는 답사 날, 봄의 기운을 담고 불어오는 바람이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사유원은 철과 콘크리트로 된 계단으로 시작한다. 걷는 내내 소나무향과 흙 밟는 소리, 회원들이 가볍게 나누는 잔잔한 대화소리가 함께 했다. 간간히 답사임을 망각하고 '좋은 산책'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산책로를 따라 10여분 걷다 보면 첫 번째 목적지인 '소요헌'이 눈에 들어온다. 소요헌은 '자유롭게 거니는 집' 이라는 주제로 설계 된, 포르투갈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작품이다. 자연과 건축이라는 극명한 차이를 조화롭게 엮어 낸 건물이다. 노출콘크리트로 된 소요헌은 인공조명 없이 자연채광만으로 공간의 깊이와 빛의 질감을 아름답게 드러낸다. 빛을 따라 걷다보면 우직한 철문이 나타난다. 호기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전면이 유리로 된 창과 건축 모형, 쉴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있다. 이 곳은 건축가의 방(요요빈빈) 이라고 한다. 알바로 시자가 디자인한 가구와 드로잉을 볼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다.알바로 시자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것'들에 영감을 얻고 발길을 옮겨, 사유원의 시작 이라고 할 수 있는 모과나무 정원 '풍설기천년'으로 향했다. 유재성 회장은 우연히 일본으로 밀반출될 예정이었던 모과나무 네 그루를 알게 되었고, 이 공간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 모과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 된 귀한 나무들이었는데, 일본 분재로 모과나무가 인기가 많아 일제 강점기시절 부터 우리나라의 모과나무가 밀반출되었다고 한다. 이를 알고 유재성 회장은 모과나무들을 사 모으기 시작하였고, 무려 108그루를 한곳에 모아 가꾸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유원의 시작이다.300년 된 모과나무지만 아직도 연분홍색의 단정한 꽃이 피고, 향기로운 모과가 열린다고 한다. 자연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다.회원들과 얘기하며 걷다보면 어느덧 사유원 정상에 도착한다. 저 멀리 대구 팔공산이 보이는 이곳에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명정이 위치해 있다. 콘크리트로 된 좁은 길을 따라 가면 지하로 내려가 하늘만 보이는 건축물과 만난다. 정상에 올라 좋은 풍경을 보았으니, 이곳에서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 명상하는 고요한 공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나 또한 이곳에서 한참을 물과 빛이 만들어준 그림자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허만수 건축사명정 옆으로는 최욱 건축가가 설계한 카페 '가가빈빈'이 자리한다. 사유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나지막한 단층의 '가가빈빈'은 사유원을 한없이 관망하기에 좋은 장소이다.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곳에서 향긋한 차와 함께하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 했다.광주에도 사유원처럼 건축적 산책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부러움과 질투가 마음한 곳에 생겨난다. 물론 광주에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예술의 거리, 광주공원, 양림동 등 역사성과 랜드마크적인 요소가 있는 좋은 건축물과 장소가 있다.광주천이나 영산강은 산책할 수 있는 보행자 동선과 자전거 도로가 잘 갖추어져 있다. 이를 활용해서 사유원처럼 숲을 거닐며 건축 산책을 하는 것과 같이 강가를 거닐며 현대 건축을 만나는 경험 또한 광주시민에게 일상 속 휴식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허만수 사계절프로젝트 건축사사무소 대표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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