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인도 북부의 자치왕국 라다크를 여행한 적이 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급경사의 낭떠러지를 옆에 끼고 위험천만한 고갯길을 지나가는 험난한 여행이었다. 아찔한 낭떠러지 쪽에 앉은 여행자들은 옆으로 눈을 돌리면 순식간에 몰려드는 무서움과 긴장감에 온몸이 굳어졌다. 몸서리치며 몇 시간을 숨 가쁘게 달리다 보면 두려움에 서서히 적응이 되었다. 심지어 신에게 운명을 맡긴 채 잠이 든 여행객들도 있었다. 지독한 두려움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익숙해지고 무뎌지나 보다. 산다는 건 열정과 혼신을 다하다가 지치고 힘들면 체념했다가 다시 일어나서 걷기를 반복하는 것인가 보다. 여행이 생의 축소판이라더니 괜한 말이 아니다.
긴장하느라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이끌고 5천m가 넘는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 라다크의 수도 '레'에 도착했다. 허연 뼈를 드러낸 듯한 앙상한 레의 산 위에서 마을을 바라본다. 오랜 시간 먼지에 쌓여 회색빛이 감도는 황톳빛과 집들. 그리고 수직으로 고개를 꼿꼿이 쳐든 미루나무가 도열하듯 서 있었다. 하늘의 별들이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지상으로 내려와 지친 몸을 뉘이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라다크에서 달의 호수가 있는 스리나가르(Srinagar)까지 가는 길은 침묵 속을 걷는 유형의 길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고요의 길에서 유목민을 만났다. 그들의 눈빛이 지상으로 내려온 별빛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유목민의 눈빛에는 속인들이 다다를 수 없는 평화와 정적이 깃들어 있었다. 정작 절절한 외로움은 온통 내 차지였다. 이 험한 곳에서 값싼 외로움으로 치장한 내 모습을 발견하고 말았다.
트빌리시에서 스테판츠민다(Stepantsminda) 마을에 있는 카즈베크 산으로 출발하기 전날 불현듯 옛 기억이 떠올랐다. 바쁘게 살면서 기억 저편에 숨겨두었던 라다크를 여행했던 시간들이 눈앞에서 서성거렸다. 출발하기 전부터 이번 여행은 외로움과 동반할 여행이라고 미리 짐작하면 그전에 다녔던 비슷한 여행이 떠오른다. 과거의 기억일 뿐이고 이미 마음 안에서 떠났다며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현듯 떠오르면 다시 긴장의 고삐를 바짝 틀어쥐어야 한다.
조지아의 스테판츠민다 여행과 라다크 스리나가르 여행은 사뭇 다르리라.
스테판츠민다의 카즈베크 산은 조지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지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고봉 위로 사람들의 발길이 쌓여 이제는 신화의 흔적들마저 지워져버린 곳.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가 신의 분노에 갇혀 있던 신화의 산. 바위 사슬에 묶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 속에서도 생명은 영원히 지속되었다. 재생되는 고통에 신음하는 신화의 산. 헤라클레스가 독수리를 죽이고 구해줄 때까지 3천년 동안이나 제우스의 쇠사슬에 묶여있었던 프로메테우스의 영혼의 부르짖음 때문일까? 스테판츠민다 마을의 카즈베크 산으로 향할 때 신들이 들려주는 깊은 저음의 코러스가 숲속 곳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카즈베크 산(Mt. Kazbek)은 높이가 5,047m이다.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북서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코카서스 산맥에는 5천m가 넘는 고봉이 일곱 개가 있다. 그중 조지아에 4개의 고봉이 있다. 카즈베크 산은 Shkhara(5,193m), Janga(5,051m)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빙하로 덮인 성층 화산인 카즈베크 산이 하늘을 곧게 치켜들고 있는 듯한 고고한 모습에 사람들은 압도당한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오직 기둥 하나만 남아 혼자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신전의 모습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이 펼쳐진 날이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보다 앞서 카즈베크 산이 청아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같다. 카즈베크 산은 1868년 영국 산악인 더글라스 프레시필드가 최초로 등정하였다. 그도 산에 오르면서 신의 소리를 들었을까.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 판도라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을까. 몇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숱한 사연을 뒤로한 채 눈물로 기도하는 수도사의 기도 소리를 들었을까. 나도 산을 오르면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나.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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