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솔숲 정자 아래 강변 마을, 애환이 깃든 광산 1번지

입력 2023.08.29. 17:15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
⑧광산구 송정동 도산동
<1970년대 송정리역.사진제공=광산구청> 그때나 지금이나 기차역은 환승센터이다. 버스,택시, 승용차,찦차와 자전거까지 온갖 교통수단이 몰려있고, 어디를 가시는지 한복을 깨끗이 차려입은 아주머니는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천방지축 아이들이 서너명 보이고, 오가는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가운데 차양막 아래는 요즘 보기드문 역전 교통경찰의 모습도 보인다. 1973~1975년도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던 그 시절! 아련한 추억속의 50여년전 역전풍경이 그리워진다.그림=정암 김집중

[광주 1000년 마을 이야기 광산구]⑧광산구 송정동 도산동

지명에는 대개 옛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그 땅의 지세와 형세와 물산에 따라 이름 지어지기도 하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재미나고 전설 같은 사연들이 지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지명은, 전에는 왜 그렇게 지어졌는지 바로 드러나 보였지만 많은 세월이 흘러 풍속이 바뀌면서, 동구 밖 당산나무의 나이테처럼 선대의 입으로 전해오는 아득한 옛 이야기를 안으로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바다를 메워 광양제철소를 세운 그 뒤편 마을의 옛 이름이 ‘쇳골’이었다거나, 충북 청주에 ‘비상리(飛上里)’와 ‘비하리(飛下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영락없이 청주공항이 들어서더라는 이야기들. 비상리에서 이륙하고 비하리에서 착륙하더라는, 어찌 그리 방향까지 내다보고 이름 지었을까 하며 선현들의 예지에 감탄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 여기에 비상의 ‘비’가 원래 ‘날비(飛)’가 아니고 비석을 가리키는 ‘돌기둥비(碑)’였으며, 비석 윗마을, 비석 아랫마을에서 유래했다는 반론도 따라붙고, 그런데 그 비석을 아직까지 못 찾는 것을 보면 원래 ‘날 비(飛)’가 맞다는 재반론도 이어지고. 이야기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질긴 생명력이 있다. 의미 전달이 끝나자마자 그 효과가 소멸되어 암기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는 지식이나 정보와는 달리, 시베리아 동토(凍土)에서 발견한 씨앗에서 1만년 전의 패랭이꽃이 피었다는 이야기처럼, 그것은 안개처럼 아득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어 이야기가 또 이야기를 낳는 무궁동(無窮動) 속으로 우리를 당기는 힘이 있다. 

1913년 개통당시 송정리역

광산구 1번지 송정동. '송정'은 우리나라 여러 고을에 흔히 붙은 이름이다. 대개 소나무 숲에 정자가 있어 '송정(松亭)'이라 불렸던 마을들.

부여의 소정이, 경주의 소징이, 정읍의 쇠정이, 포천의 쇠쟁이, 인제의 솔정지, 다들 그 유래가 같다. 이것이 한자로 바뀌면서 '송정'이 됐고, '소정이'는 '우정(牛亭)동'이 되기도 했다. 광산의 송정(松汀)은 한자가 다르다.

'정자정(亭)'이 아니라 '물가정(汀)'을 쓴다. 그런데 이 '송정(松汀)'이 1879년 '조선후기 지방지도'에는 '송정(松亭)'이라 표기됐고,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 명칭일람'이라는 책의 광주군조에는 '송정(松亭)면 송정(松汀)리'라고 기록돼 있다. '송정(松亭)'은 소나무 숲에 정자가 앉아 있는 곳이지만 '송정(松汀)'은 거기에 하나 더, 연못이나 하천이 흐르는 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일대가 서북에서 내려온 황룡강과 동북에서 흘러든 극락강이 만나 영산강으로 합쳐지면서 나주평야를 관통하는 Y자형 두물머리인 것을 보면 '정(亭)' 보다는 '정(汀)'이 더 잘 어울린다.

조선후기 문신 오횡묵의 '지도총쇄록'에 그가 지도군수로 부임하며 이 일대를 지나는 감상을 적은 대목이 나온다.

'백마산 서남쪽 끝에 극락원(極樂院)이 있는데 원 주변에 방죽이 있고 연꽃이 피어 향기가 그윽하다. 멀리 바라보이는 갈대숲에 띄엄띄엄 마을이 보이고 고총(古塚·옛 무덤) 주변에 소나무가 둘러져 해오라기가 노닌다'고 기록돼 있다.

류복현 전 광산문화원장은 '이 극락원 주변이 극락강 건너 야촌 도호 도산 용보 고내상 마을 등 송정동과 도산동 일대로 보인다'면서 '너른 습지 군데군데 돌무덤과 둔치가 있어 철새들의 도래지가 됐을 것이고, 강이 샛강이 되고 잡초가 우거진 강가에 사람들이 논밭을 개간해 정착하면서 마을이 됐을 것'이라고 '광산구사'에 쓰고 있다.

1986년도 송정리역

광산구청 소재지인 송정동은 동으로 신흥동, 서로 평동과 이웃하고, 남쪽에 도산동과 동곡동, 북쪽에 어룡동과 마주한다.

좁게는 법정동 송정동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옛 송정시 일원(도산, 어룡, 우산, 신흥)을, 더 넓게는 송정권 지역 전체(동곡, 평동, 삼도, 본량)까지도 송정이라고 불린다.

광주에서 나주평야를 지나 목포항으로 이어지는 길목의 송정은 예부터 사통팔달의 요충지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수탈의 기지였다.

전라도 각 지역에서 나는 곡식과 특산품 같은 물산들이 대형 미곡창고가 있는 이곳으로 옮겨져, 일본 열도로 가거나 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실어 나르는 전초기지였다.

1913년 양곡창고가 있던 이곳에 목포까지의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역이 들어선다. 아직 광주역이 생기기 전이어서 광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작은 정거장에 불과했던 송정리역은 1920년 즈음 일본인들이 대거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게 됐고, 해방 이후 1세기 넘도록 교통의 요충으로 기능해 왔다.

1988년 역사 신축과 2004년 증개축을 거쳐 2009년 광주송정역으로 개명됐다.

2015년 호남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광주역을 밀어내고 남도의 핵심 정거장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 지역이나 역과 장은 뗄 수 없는 공간이듯이 역이 생기던 그해 자연스레 역 앞에 장이 섰다. '매일송정역전시장', 2016년 '1913송정역시장'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바로 그 시장이다. 지역문화를 토대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길거리 공연 중심의 볼거리를 만들었고, 야시장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전통시장에 접목해 '문화체험형 시장'으로 변화를 꾀했다.

건물의 옛 모습을 그대로 살리고, 또 추억이 살아나는 간판도 옛것을 바꾸지 않고, 시장바닥 곳곳에 가게건물이 완공된 연도 표석을 새겨 넣는 등 100년의 시간여행을 느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단장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한 관광명소로 떠오르는 곳이다.

상설시장인 '송정매일시장', '송정5일시장'과 더불어 송정리 3대 시장으로 불린다.

송정5일장은 1964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는데, 3·8일 장날 전라도 소들이 다 모였다고 할 만큼 큰 우시장이 섰고, 열차 곡물수송이 편리해 대규모의 미곡시장이 열렸으며, 더불어 가마니장으로도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전통시장이다. 지금 시장 주차장 자리가 옛 우시장이 섰던 곳이다.

1970년대 송정리역

2003년 광주시가 '미향(味鄕)'의 멋을 살려 대표음식으로 '5미(味)'를 선정했는데 '광주 한정식', '광주 오리탕', '무등산 보리밥', '광주 김치'와 더불어 '송정 떡갈비'가 들어간다. 광산구청 주변에 이 떡갈비집들이 밀집돼 '송정리 향토 떡갈비거리'가 조성됐다.

'광산구사'에 따르면 1950년대 최처자 할머니가 그 원조다. 당시 최할머니가 길거리에서 탁자와 의자만 놓고 떡갈비와 비빔밥을 팔기 시작한 것이 유래가 됐다.

오일장 옆이어서 우시장과 푸줏간에서 나오는 자투리 고기들이 흔했다. 발라낸 갈빗살에 양념해 숯불에 구워낸 떡갈비와 고추장에 버무린 비빔밥은 소 팔러 나온 사람, 장보러 나온 사람들을 상대로 짧은 시간에 허기를 달래는 장바닥 음식으로 그만이었다. 떡갈비는 인절미를 치듯이 네모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살점이 붙은 돼지 뼈를 무 양파 마늘 생강과 함께 푹 삶아낸 뼛국도 별미다.

송정을 이야기하면서 '용보(用洑)'를 빼놓을 수 없다. 송정1동, 조선 초기 전라병마도절제사의 병영이 있던 터다.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이 병영을 태종 17년(1417년) 강진으로 옮기는데 그곳이 지금의 강진군 병영면이다. 용보는 남쪽에 사는 해오라기가 많이 찾아와 '회오리방죽'이라 불리던 옛날 '고내성(古內城, 또는 古內廂)', 지금은 공항이 돼버린 인근 마을이다.

황룡강에서 송정들녘으로 흐르는 '봇도랑'이 마을을 관통한다고 해서 나루터를 뜻하는 '용보'가 되었다고 한다. 1964년 광주공항이 들어서기 전까지 남평으로 가는 큰 길가의 촌락으로 '한새골(황새골)'이 있던 너른 들녘이었다.

이곳에 공군전투비행단이 창설되면서 미군들이 주둔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기지촌'이 들어섰다. 1968년 외국인 전용 유흥술집 '보난자'를 시작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식당 세탁소 잡화점 미장원 등 40여개의 상가가 들어서면서 마을은 상전벽해가 되었다.

어느 날은 하루에 500여명의 미군이 쏟아져 나와 용보촌 상가는 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지역경기도 덩달아 호황을 누렸다.

30여호 용보촌 원주민들은 대부분 셋방을 놓아 생계를 유지했다.

한창 경기 좋을 때 '용보촌은 동네 개들도 입에 달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며, 미군과 아가씨들이 어울려 다니는 송정시가지는 이국적인 풍경에 젖어 들기도 했다.

전국에서 상업지역이 아닌 주거지역에 기지촌이 들어선 것은 용보가 유일했다. 1990년대 미군 감축이 시작되면서 많은 상가가 폐업하고 그 흥청거리던 네온사인의 거리는 빛을 잃었다.

지금은 마을 도랑 길을 따라 기지를 둘러친 긴 벽과 주변의 아파트들 사이에 몇 안 되는 원주민들의 집이 남아 있다.

2023년도 광주송정역

광산구는 조선시대 병영으로부터 시작해 일제강점기 근대도시로 성장한 이 일대에 '역사문화 산책길'을 조성해 놓았다. 광산의 명동이라 불리던 '광산로'를 시작으로, '송정 오일장'과 '1913 송정역시장', 그리고 송정역 건너편의 '미곡시장'을 거쳐 주택단지 속의 푸른 공간인 '도시 속 논밭'을 지나는 길이다.

이 길의 끝인 송정2동과 도산동 사이 사거리 한편에 옛날 여기가 강이었음을 알려주는 '도산교(道山橋) 표지석'이 서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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