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文·武·忠·義<문·무·충·의>로 점철된 삶··· '돌 여울'처럼 빛났다

입력 2023.08.15. 18:10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⑦광산 흑석동 유애서원 이신의
흑석4거리 부근 도심속 노송숲을 배경으로 아담한 서원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중기 명종~인조년간을 '우국일념(憂國一念)'으로 살다간 이신의(李愼儀)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는 <유애(遺愛)서원>이다.지난 8월초 어느날 서원답사를 하였는데 외삼문인 '우사문(于斯門)'담장 양 모서리에 만개한 배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림=김집중작가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⑦광산 흑석동 유애서원 이신의

적객에게 벗이 없어 공량(空樑)의 제비로다/ 종일 하는 말이 무슨 사설 하는지고/ 어즈버 내 풀어낸 시름은 널로만 하노라(4장)//인간(人間)에 유정한 벗은 명월밖에 또 있는가/ 천리를 멀다 아녀 간 데마다 따라오니/ 어즈버 반가운 옛 벗이 다만 너인가 하노라(5장)//설월(雪月)에 매화를 보려 잔을 잡고 창을 여니/ 섞인 꽃 여윈 속에 잦은 것이 향기로다/ 어즈버 호접(胡蝶)이 이 향기 알면 애 끊일까 하노라(6장)

이신의의 단가육장(短歌六章) 중 4~6장이다. 4장의 적객(謫客)은 귀양살이 하는 사람이고, 공량은 지붕 아래 들보다. 귀양살이하는 내 처지가 빈 들보에 앉은 제비와 같은데, 제비가 종일 지지배배 뭐라 하지만 내 시름만 하겠느냐는 말이다. 5장은 천리를 가도 벗 하나 없는 형편에 오직 밝은 달이 따라오니 유정한 옛 벗은 너뿐이로구나, 하는 애달픈 심사를 담았다. 6장은 눈 내린 달밤에 창을 여니 매화 향기 가득해 나비가 이 향기를 알면 애태워하겠구나 하는 뜻이다. 이 연시조는 2010년 수능 모의고사를 비롯해 언어영역 시험에 단골로 나오는 지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함경도로 유배됐을 때의 심정과 처지가 잘 드러나 있는 점, 제비와 달과 매화라는 자연의 '경(景)'에 상징과 은유를 넣어 고독과 시련과 지조 같은 사람의 '정(情)'을 담아 시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대목, 나비에 빗대 애끓는 적객의 심경을 은은하게 드러내면서 종장을 마무리 짓는 솜씨가 탁월한 작품이다.

특히 '빗속에 누렇게 잎 시든 나무(雨中黃葉樹)/ 등불 아래 허옇게 머리 센 사람(燈下白頭人)'처럼(남호시화) 시는 경과 정의 줄다리기라는 '정경론(情景論)'을 잘 이해하면 이 단가육장의 문제를 풀 수 있다.

이신의(李愼儀·1551~1627)는 한성에서 태어나 고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형조판서 이원손이며, 어머니는 정종(定宗)의 현손이다.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형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도라산 숲속에 서실을 지어 공부하는데 물이 바위를 굽이쳐 흐르는 것을 보고 여울의 '탄'을 넣어 호를 석탄(石灘)이라 했다. 서경덕의 문하인 초당 허엽과 행촌 민순을 사사했다.

32세(1582)에 학행으로 천거돼 효릉 참봉으로 출사했다. 그러나 곧 사직하고 학문에 힘써 '대학차록'과 '가례차록'을 저술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석탄은 의병 300여명을 결집해 고양에서 창의했다. 도라산에 진을 치고 창칼로 무장해 '이신의 창의대'라는 깃발을 세웠다. 고향을 지키려는 이 작은 부대는 왜적이 쳐들어오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유애서원 외삼문(우사문)

석탄은 제갈량이 그랬던 것처럼, 수적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계곡에 쌀뜨물처럼 보이는 백토를 흘려보내는가 하면, 산 능선에 수많은 깃발을 꽂아두고, 밤이면 횃불 든 병사들을 바삐 왕래하게 해 군량미가 넉넉한 큰 부대가 진주한 것처럼 지략을 폈다. 고양 서북쪽 10리 거리에 주둔하던 왜군은 섣불리 도라산을 공격하지 못했고, 창의대는 야음에 기습하는 유격전을 전개했다. 왜군으로부터 탈취한 조총으로 재무장한 창의대는 다양한 전술을 펴 승리함으로써 고양 주민들을 전란으로부터 지켜냈다.

이듬해 권율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전투를 벌일 때 석탄의 창의대는 적의 측·후방을 치는 게릴라 작전을 펼쳐 행주대첩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이 공으로 석탄은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고, 1740년 그 자리에 주민들이 '이석탄장대(李石灘將臺)' 비를 세운 것이 지금도 남아있다.

이런 전과를 창의사 김천일이 장계를 올려 알렸고, 석탄은 그 해 직산현감에 제수된다. 1596년 서얼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 고을 수령들이 줄줄이 도망해 여러 현이 함락됐다. 이 와중에 석탄은 천안군수 정호인과 8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이어 괴산·임천 군수, 홍주·해주목사를 거쳐 광주목사를 역임하면서 목민관으로 이름을 날렸다.

광산이씨 추모비

1617년, 영창대군이 참살당한 이후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하기 위해 문무백관의 의견을 듣는 '수의(收議)'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석탄은 글을 쓴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렸으나 "어찌 배운 바를 버리고 불충하겠는가" 하면서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항론(抗論)을 올린다.

이 일로 이듬해 2월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를 간다. 추운 겨울날 북으로 귀양 가는 외로운 길에 홀로 따라오는 밝은 달, 가시 울타리 속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초가의 창을 여니 설월(雪月)에 매화로다. 그는 유배지 관할 북병사 이수일에게 서신을 띄워 낡은 거문고를 건네받고 그것을 탄주하면서 긴 귀양의 시간을 달랬다.

악기 뒤에 그런 내력의 명문(銘文)이 남아있는 이 '석탄금'은 후손에게 전해져 문화재가 됐다. 석탄은 이곳에서 '단가육장'을 썼다. 그리고 또 하나의 걸작 '사우가(四友歌)'를 쓴다. 네 벗은 송(松)-국(菊)-매(梅)-죽(竹)이다. 역시 정경론을 바탕해 시련에 굴하지 않은 그 고절함을 담았다.

소나무는 '풍상을 겪었어도 그 여읜 흔적 전혀 없네' 했고, 국화는 '봄빛을 마다하고 된서리에 홀로 피니' 했고, 매화는 '눈 속에 흰 빛으로 꽃이 피기 때문이라' 했고, 대나무는 '온갖 꽃 다 져버리고 대숲만이 푸르구나'라고 썼다.

고산 윤선도가 해남 금쇄동에 은거할 때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의 다섯을 벗 삼아 지은 '오우가(五友歌)'보다 20여년 앞 선 작품이다.

배롱나무 꽃

1623년 광해군의 폭정에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키니 인조반정이다. 석탄은 5년의 귀양을 마치고 형조참의로 조정에 복귀한다. 광주목사에 이어 형조참판(종2품)에 오른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날 때 석탄은 노구를 이끌고 인조 호종을 위해 강화도로 향했다가 병을 얻어 수원의 어느 여사(旅舍)에서 숨을 거두었다. '우국일념(憂國一念)'이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향년 77세.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그리고 광주의 유애서원(遺愛書院)에 제향됐다.

석탄 일가는 대대로 한양 주변에 살았는데 어찌 광주 광산 유애서원에 모셔졌을까? 서원 솟을삼문 앞에 그 사연이 적힌 '낙남유래비(落南由來碑)'가 있다. 석탄은 지금의 세종시 일대인 '전의이씨'이고, 큰 며느리는 '광산이씨'이다. 남편은 석탄의 귀양 뒷바라지를 하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홀로 자식을 키우며 살았다.

이신의선생 거문고(국립광주박물관)

그러던 어느 밤, 인조반정의 주역인 무신 이귀가 찾아와 동참을 요청했고 석탄은 그 대열에 합류한다.

이 소식을 들은 큰 며느리는 그 날로 짐을 꾸려 네 자식을 이끌고 친정 나주로 피신한다. 반정은 실패하면 삼족이 멸하는 역모 아닌가. 더구나 34년 전인 1589년 기축옥사 때 친정아버지가 처형을 당하는 아픔까지 겪었으니, 정변을 앞두고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집을 버리고 남행을 감행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광산이씨의 강단이 엿보인다. 이후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나주 광산 일대에 후손을 번성시켜 전의이씨 석탄공파의 일가를 이룬 내력이 그 비에 적혀있다.

광산 흑석동 유애서원은 삼문 양편에 배롱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핀 아담한 공간이다. 1754년 이신의의 충절을 기려 호남 유림이 건립했다가 1868년 훼철됐다. 이어 1919년 경장각을 짓고 2000년 사우(祠宇)를 마련해 서원으로 성균관에 등록했다. 석탄금과 더불어 선조가 쓴 당 오언시를 목판에 새겨 찍은 여덟 폭 병풍(인조의 하사품), 130여점의 고문서가 광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고양에서 창의해 왜적을 무찌른 무(武)의 한 매듭, 인목대비 폐비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항론을 쓰고 귀양길에 오르는 의(義)의 한 매듭, 폭군을 몰아내고 반정의 대열에 합류하는 충(忠)의 한 매듭, 그리고 단가육장과 사우가 등 뛰어난 문학작품을 남긴 문(文)의 한 매듭, 그렇게 그는 '절(節)'이 많았다. 한 생을 살면서 한 매듭을 짓기도 어려운데, 석탄 이신의는 곧은 정신에 바탕해 문-무-충-의의 반짝이는 여러 빛깔들을 보여주었다. 이광이 객원기자

슬퍼요
0
후속기사 원해요
3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mdilbo.com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

댓글0
0/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