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시냇가 시문학을 이끌고 큰 바다로 ‘떠나가는 배’

입력 2023.08.01. 18:22 박지경 기자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
⑥광산 소촌동 박용철 생가
<박용철 생가 안채와 장독대>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 대문을 막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더위를 식힌다. 해설사분께서 내주시는 시원한 음료와 친절한 안내는 방문객의 피로를 싹 가시게 한다.잠시의 여유를 즐기고 뒤로돌아 돌계단 몇 개 오르면 안채와 함께 정감어린 장독대가 있고, 저쪽 마당 한켠에는 "떠나가는 배" 시비(詩碑)가 아담하게 놓여있다. 어릴적 고향집에 온 듯한 감상에 젖어 사진 한 컷 남겨와서 화폭에 옮겨 보았다. 정암 김집중 그림

[광주 1000년 마을이야기 광산구]⑥광산 소촌동 박용철 생가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시 「향수」의 부분이다.

‘일가 흩어지고 집 무너진데/ 저녁 가마귀 가을 풀에 울고/ 마을 앞 시내도 사미완(事美?) 바뀌었을라/ 어린 때 꿈을 엄마 무덤 위에/ 남겨 두고 떠도는 구름따라/…험한 발에 짓밟힌 고향생각/-아득한 꿈엔 달려가는 길이언만-/ 서로의 굳은 뜻을 남게 앗긴/ 옛사랑의 생각 같은 쓰린 심사여라.’ 박용철의 시 「고향」의 부분이다.??

고향을 향해 가는 두 시인. 꿈에도 잊지 못하고, 꿈에도 달려가는 길이건만, 하나는 흐릿한 불빛 아래 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아늑한 고향이고, 하나는 무덤 위에 떠도는 구름처럼 험한 발에 짓밟힌 애달픈 고향이다.

문학평론가 김용직은 두 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했다. 정지용이 '황소의 울음'이라는 청각을 '금빛 게으른 울음'으로 색채화 하고, 영랑은 감정을 정서로 바꾸는데 역점을 두면서 말을 쓴데 반해, 박용철은 감각의 상태에 그치기보다 서술 쪽으로 기울면서 상실의 감정이라든가 우수의 그림자 같은 사색적 속성이 깃든 시를 썼다고 그의 평론 '순수와 반기교주의'에서 밝히고 있다. 지용과 영랑이 선점한 감각과 정서에 철학과 사색을 더해 용철은 높은 수준의 서정시를 쓰고 싶었다는 얘기다.

용아 박용철(1904~1938)은 광산군 송정읍 소촌리에서 3천석 지주 가문의 3남으로 태어났다. 눌재 박상의 16대손이다. 아버지는 식산은행 일을 했다. 두 형이 요절해 장남으로 자랐지만 그 역시 병약했다. 휘문의숙과 배제학당에서 공부했다.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을 거쳐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했다가 관동대지진 때 귀국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다 자퇴했다.

박용철 생가 사랑채

"그놈 조센징 말이야, 용철이란 놈이 수학과 수석이야. 삐쩍 마른 자식 말이야." 윤식은 교문을 앞서 나온 일본학생들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듣고 쫓아가 물었다. "용철이란 학생이 혹시 조선학생 아니요?" "아, 그놈 말이요? 고향이 조선 전라도 어디라던데…" 윤식은 뒤돌아서 서쪽 후관 삼층 강의실로 뛰어 올라갔다. 거기서 노교수와 얘기하며 걸어 나오는 용철과 마주친다. 윤식이 단숨에 "혹시 용철씨 아니요?"라고 물으니, "그렇소. 뉘신지요?"하고 용철이 답한다. "나는 전라도 출신 김윤식이요. 전라도 제일 끝 강진이 고향입니다." "저는 전라도 광주 송정입니다." "박형, 축하하오. 수석하셨다면서요?" 둘은 기쁨의 악수를 나누고, 용철의 하숙집 가까운 아카사카 요정 근처의 어느 술집으로 들어섰다.' ('시인 영랑 김윤식의 전기'에 나오는 내용 갈무리)

1921년 용아와 영랑은 그렇게 만났고, 우리 문학사에 빛나는 한 장을 장식한 '시문학파'의 서막은 그렇게 열렸다. 용아가 입버릇처럼, '윤식(允植)이가 나를 오입(誤入)시켰다'는 말처럼, 용아는 수학을 버리고 영랑을 따라 문학의 길로 들어선다.

용아의 문학이력은 짧다. 1930년 '시문학'지 창간을 시작으로 1938년 타계하기까지 9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시를 쓰고, 외국 시와 희곡을 번역하고, 연극운동을 펼쳤으며, 문학동인지와 문예지를 발간했고, 궁핍하던 시대 평론가로서 탁월한 족적을 남긴다.

용아는 27세, 영랑과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 사재를 털어 '시문학'지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길을 걷는다.

박용철 생가 안채

'우리는 시를 살로 색이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맺힘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는 지나는 걸음에 슬쩍 읽어 치워지기를 바라지 못하고 우리의 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워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느낌이 있을 때 절로 읊어 나오고 읊으면 느낌이 일어나야만 한다. 한 말로 우리의 시는 외워지기를 구한다. 이것이 오직 하나 우리의 오만한 선언이다.…'

우리가 살과 피의 응결로 시를 쓰니 너희는 스무 번은 읽어 외워야 한다는 이 오만한 선언이 '시문학' 창간호에 용아가 쓴 편집후기이다.

'시문학'은 3월에 1호를 내었고, 그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도 여기에 실렸다. 5월에 변영로·김현구가 동참해 2호, 이듬해 10월 신석정·허보가 합류해 제3호를 내고 종간됐다. 이들 9명의 시인들이 '시문학파'다. 그것은 당시를 풍미했던 카프문학과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됐다.

조지훈은 "시문학파가 시어의 조탁, 각도의 참신, 형식의 세련 등 종래의 시를 일변시켰다는 것은 중론이 일치하는 바, 그들은 한국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평했다.

그는 서울 옥천동 집에 출판사 '시문학사'를 설립했다. '시문학' 3권에 이어, 1931년 '문예월간'을 창간해 4권을 발행했고, 1934년에는 '문학'을 내어 3호를 발행하는 등 도합 10권의 문예지를 남겼다. 1935년 10월 '정지용 시집'을, 11월에 '영랑시집'을 발간했다.

모든 비용과 편집 실무를 혼자 도맡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시와 평론과 번역 등 왕성한 글쓰기를 계속해왔던 것이다.

'용아 박용철은 한국 현대시의 새 길을 닦는데 희생과 헌신을 했을 뿐, 자신의 시집이나 평론집을 만들지 않았다.…자신의 건강도 돌보지 않고 일에만 열중했던 그는 사명에 불타는 문예운동가의 모습 그대로였다. '시문학지' 창간에서부터 평론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발표하기까지 8년 동안의 삶은 온전히 한국문학을 위한 공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인천대 유승우 교수, '문예운동가로의 박용철의 삶과 문학' 중에서)

용아는 1938년 5월 후두결핵으로 타계했다. 향년 35세.

생가 안채 대문

그해 1월 그의 대표적 평론이자 시작이론으로 지금도 널리 읽히는 '시적 변용에 대해서'를 '삼천리문학'에 발표했다. '…피보다 더욱 붉게, 눈보다 더욱 희게 피어나는 한 송이 꽃. 우리의 모든 체험은 피 가운데로 용해한다. 피 가운데로 피 가운데로 한낱 감각과 한 가지 구경과 구름같이 피어올랐던 생각과, 한 근육의 움직임과, 읽은 시 한 줄, 지나간 격정이 모두 피 가운데, 알아보기 어려운 용해된 기록을 남긴다. 지극히 예민한 감성이 있다면, 옛날의 전설같이 우리의 맥을 짚어봄으로, 우리의 호흡을 들을 뿐 얼마나 길고 가는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랴! 흙 속에서 어찌 풀이 나고 꽃이 자라며, 버섯이 생기느뇨? 무슨 솜씨가 핏속에서 시를, 시의 꽃을 피어나게 하느뇨?…'

도심에서 문득 맞닥뜨리는 초가집 한 채, 소촌동에 있는 용아 생가다. 소촌동은 지형이 가마솥 같아서 정두(鼎頭)라 했고, '솥머리'로도 불렸다고 한다. 마을 앞으로 황룡강이 흐른다. 이 사랑채가 용아와 영랑이 막걸리를 마셔가며 시와 문학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다. 아버지가 이 집 지붕에 기와를 얹어 개량하려고 하자 그는 "시골집은 초가라야 어울립니다. 가을에 이엉을 이은 뒤에 은은한 달빛이 비추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랗게 빛나는 그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생가 마당 '떠나가는 배' 시비

안채 뜨락에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두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구인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 같이 물 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 표랑하는 삶을 비유한 작품이다. 그렇게 머물렀다가 또 다른 정박지를 향해 떠나가는 배,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나두야 간다, 나두야 간다, 하고 가락이 들리는 듯하다.

'미의 추구…우리의 감각에 녀릿녀릿한 깃븜을 이르키게 하는 자극을 전하는 미, 우리의 심회에 빈틈없이 푹 드러안기는 감상, 우리가 이러한 시를 추구하는 것은 현대에 있어 흰 거품 몰려와 부듸치는 바희 우의 고성(古城)에 서 있는 감이 잇습니다. 우리는 조용히 거러 이 나라를 차저볼가 합니다.'

더 높은 곳에서 더 고결한 시를 꿈꾸었던 박용철, 살아생전 다른 시인들의 시집과 많은 책들을 발간한 그였지만, 정작 자신의 시집은 그가 떠난 이듬해 영랑과 김광섭 등이 나서 '박용철전집' 2권을 발간함으로써 유작집으로 세상에 나왔다. 광주공원 영랑의 시비 곁에 용아의 시비가 서 있다. 이광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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