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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박해현의 새로 쓰는 전라도 마한사 14. 우리나라 해양신앙의 기원, 남해신사(南海神祠)(下)

입력 2020.02.06. 00:00 @김혜진 eksy1221@srb.co.kr
마한 시기남해포에 해신제 올리는 제당 있었을 듯
죽막동 출토 유물들

1997년 목포대 박물관이 남해신사 터를 발굴할 때 15, 6세기 분청사기와 백자 등이 출토되어 조선 시대에 제의가 행해졌음이 확인되었을 뿐 그 이전 시기, 즉 고려 시대에 제를 지낸 흔적이 될 만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남해신사에서 고려 이전에 해신제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는 셈이다.

그러나 남해신사가 고려 시대에 분명히 있었다. 목포대 조사보고서에서 “남해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적 기록으로는 ‘증보문헌비고’에, 고려 현종 19년(1028년) 비로소 사전에 올렸다”라고 되어 있다. 남해신사는 고려 시대에 처음으로 전남지방에서 국제(國祭)로 등록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목포대 보고서의 서술은 부정확한 곳이 적지 않다. 예컨대 신사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이 ‘증보문헌비고’라고 언급하였으나 ‘고려사’ 현종 16년 조에 ‘陞南海神祀典(승남해신사전)’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곧 현종 16년에 남해신사를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였음을 알려준다.

‘고려사’에 명백히 있는 기록을 구한말에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서 처음 언급되었다고 살핀 것은 잘못이다. ‘현종 19년’도 ‘현종 16년’의 오기이므로 바로 잡아야 한다.

고려 현종 때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남해포에 있었음이 분명히 확인된다. 부안의 죽막동 신당처럼 남해신사도 고려 훨씬 이전 시기에 이미 존재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고서에 따르면 주거지 유구는 1~4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마한 시대에 그곳에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묘당 옆에 신당 운영과 깊이 관련이 있는 우물터가 확인되는 것 또한, 이곳에 오래전부터 신당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상평통보, 관영통보, 도광통보 등 한국, 일본, 중국에서 17, 8세기에 사용된 화폐들도 출토되었다. 출항에 앞서 선원들이 이곳 신당에 와서 해신제를 지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선 후기까지도 남해포가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항구였음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양양의 동해묘의 중수비에 “신라 때부터 이곳에서 용왕께 제사를 지냈다”라고 쓴 것을 보면 바다의 용왕께 제를 지내는 해신제가 삼국시대에도 이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해묘에서 주관한 해신제가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남해포에는 이미 마한 시기부터 해신제를 올리는 제당이 당연히 있었을 법하다.

한편, 남해신사가 고려 현종 때 ‘大祀’에 편입되었다고 하는 주장도 바로 잡아야 한다. 신라는 三山을 大祀에, 악진해독을 中祀에, 명산을 小祀에 각각 등재하는 등 국가의 사전 체계에 산악신앙을 편입하였으나, 고려는 大·中·小祀와 함께 雜祀를 별도로 독립 항목으로 만들어 놓고, 잡사에 압병제(壓兵祭), 초(醮), 남해신(南海神), 성황(城隍), 천상제(川上祭), 노인성(老人星), 5온신(五溫神), 명산대천(名山大川), 기자사(箕子祠),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 등으로 분류하였다. 남해신을 잡사에 포함시킨 셈이다.

고려사에는 ‘동해신’, ‘서해신’ 등 다른 해신과 관련된 사전은 없다. ‘남해신’만 독립적인 사전 체계로 만든 것은 남해신사의 제의를 특별히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당시 기록에는 “해양도의 정안현에서 산호수를 두 번이나 바쳤으니 남해의 용신에게 마땅히 사전을 승격시켜 그 현공을 표창할 것이다”라고 하여 산호수를 공납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안현은 고려 인종 이전에는 영암 지역에 속해 있었으므로 영암 지역에서 산호수를 공납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옳다. 공물 때문에 사전으로 승격시켰다는 것인데, 아무리 공물을 진상하였다 하여 그곳에 있는 신사를 국가의 사전으로 승격시켰다고 살피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필자는 남해신사가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 않나 한다.

해상 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왕건은 해신에게 공을 들였다. 그가 남긴 훈요십조에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섬기라” 한 구절에서 ‘용신’을 섬기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태조 왕건이 ‘해신’의 중요함을 특히 강조하고 있음을 알겠다. 고려 초에 별도의 사전 체계가 미처 확립하지 않은 상황에서 태조 왕건이 팔관회를 통해 해신사의 제의를 후원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고려 국초에는 남해신사만 별도의 사전 체계에 편입되어 있을 뿐, 양양의 동해묘, 풍천의 서해단 언급은 없다. 조선 세조 때 양성지가 “지금 있는 동해, 서해, 남해의 해신제를 주관하는 신사가 양양, 풍천, 남해에 있는데 모두 개성을 기준하여 만들어졌으므로 재고를 해야 한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곧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고려 시대에 이미 성립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서야 양양에 있는 동해묘에서 지방관이 해신제를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 중기 문인 임춘의 ‘익령(양양)으로 가는 길에’라는 글에 “산천에 명승 많으나 풍속은 중국과 달라 (중략) 풍년이라 귀신에게 제사 지내는데 진귀한 산물로 바닷고기가 풍성하구나. 얕은 물에는 찬바람 맞으며 오리가 뜨고 깊은 숲에는 석양 속에 까마귀가 운다. 妖祠(요사)에서 楚舞를 올리는데”라 하여 당시 동해묘에서 행해지는 해신제를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동해묘는 주로 안전 항해를 기원한 남해신사와는 달리 풍어제의 성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임춘이 ‘요사’라고 하여 부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임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동해신사에서는 국가나 관청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제의가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별도의 사전체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국제가 아닌 지방관이 제를 주관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부안 격포에서는 국제가 아닌 지방관이 주관하는 수준의 해신제가 치러졌다. 서해단도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동해묘와 비슷한 처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고려 후기에 이르러 관에서 주관하는 해신당이 동, 서해에 추가되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인 사전 체계가 수립되어 국제가 되어 있는 남해신사와 비교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남해신사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가 크다.

남해신사는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사전 체계에 편입되어 있었다. 세종 때 “나주 남해는 중사이고 묘 위판을 ‘남해지신’이라고 쓰라, 금성산은 소사이고 묘 위판은 ‘금성산지신’이라고 쓰라. 제사는 소재관(나주 목사)이 하라”라 하였다는 기록이나, 성종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나주목조에 “남해신사, 사전에 중사(中祀)로 삼아 봄, 가을에 국왕이 향을 내려 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있다(祀典載中祀春秋降香祝致祭)”라는 기록에서 이미 조선 초에 남해신사가 中祀에 편입되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남해신사는 고려에 이어 조선에도 국가의 사전 체계에 편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남해신사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이 수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하였음이 느껴진다. 동해묘도 중사에 편입되어 있었지만 ‘降香祝致祭’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고, 풍천의 서해단은 ‘降香祝致祭’라는 표현은 있지만, 사전 편입은 언급이 없다. 이처럼 사전에 편입되고 국왕으로부터 제물까지 받은 신당은 남해신사만 유일함을 알 수 있다. 마한 이래 고려, 조선을 거쳐 국가에서 주관하는 해신제가 열리고 유구가 확인된 사당은 남해신사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충분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문학박사·초당대 교양교직학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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