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삼베에 어린 지역 여성 삶 이야기

입력 2022.09.01. 09:26 김혜진 기자
전남여성가족재단 여성생애구술사
스토리북·영상콘텐츠로 생생하게
내달 말께 홈페이지·유튜브서 공개
박영남씨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왔지만 역사에 남지 않은 이들이 있다. 집안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채 살아온 우리네 엄마, 아내, 며느리, 누나, 언니, 여동생…. 바로 여성이다. 전남여성가족재단이 그동안 기록되지 못한 여성들의 삶을 조명, 역사로 남긴다. '전남 여성생애사'를 통해서다.

그동안 여성친화농촌마을, 지역여성창취업사례 등을 기록해온 재단은 올해 '보성 삼베'에 집중한다. 보성 북부 지역은 예로부터 삼베 생산과 유통의 중심지였으나 역사적 기록이나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이에 바탕해 보성 북부 지역 여성 3인을 통해 이들의 삶과 지역 역사의 교차 지점을 담아냈다.

구술에는 1928년생 송순남씨와 1946년생 박종례씨, 1954년생 박영남씨가 참여했다. 이들은 '인생 절반이 길쌈'이라며 삼베를 '지긋지긋하다' 말하지만 식구들을 먹여살릴 수 있게 만든 고마운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그토록 알아주던 '보성 삼베'는 중국의 값싼 인조 섬유가 들어오며 점차 사라졌다. 현재는 명맥만 유지하는 중이다.

길쌈하면 많은 이들에게는 '전통문화'로 여겨져 아주 먼 옛날 풍습 같이 느껴지지만 세 사람에게는 삶의 현장이다.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희생을 감내해 온 삶의 한 지점이다. 먹고 사는 일 때문에 쉼 없이 길쌈을 해온 지역 여성들이 결국 전통을 지금껏 지켜온 것이다. 이 때문에 그동안 길쌈과 삼베가 역사적으로 크게 조명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송순남씨

송순남씨는 "동네 여인들이 모두 뒷산으로 화전놀이를 갔어도 나는 밥하고 베 짜느라 한 번도 가지 못한 것이 한이다"고 떠올린다. 길쌈은 지독한 노동의 현장으로서 가부장제 속 여성의 위치와 노동에 대해 기억하게 한다.

박종례씨

박종례씨는 "베를 팔아도 돈 한 푼을 안주고 부려 먹었다"며 "밥 해묵고 길쌈하고 밥 해묵고 길쌈하고…. 방 절반만한 베틀을 놓고 길쌈만 하라고 했다"며 서러운 기억을 끄집어낸다. 평생 이어온 길쌈에 있어서 숙련공이자 장인이라 할 수 있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정당한 노동의 값어치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나날이다.

박영남씨는 "가난을 물리쳐야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서 떠나보낸 적이 없다"며 "살아온 길은 말로 해도 다 못하지만 삼베를 선택해 내 평생 살면서 지금에 와서 이렇게 누리고 사는 것이 삼베를 한 덕인가 싶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길쌈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오며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낸 여성의 힘이 배어있는 현장이다.

가난을 끊어내기 위해, 돈도 받지 못하고 하루 종일 작은 방에 갇혀서,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삼베를 직조해냈기에 지난 세월을 회상하면 혀를 내두르는 이들이지만 베 짜는 풍습이 점차 사라져감에 아쉬움을 짙게 드러내기도 한다.

안경주 전남여성가족재단 원장은 "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는 마음으로 삼베를 지켜온 여성들의 기억들을 듣고 엮어낼 예정이다"며 "이번 사업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 기록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남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질 것이다. 전남의 역사가 본 기록을 통해 보다 여러 가지의 결로 살아 숨 쉬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특히 올해 전남여성생애구술사는 생애구술사 스토리북과 함께 영상생애구술사를 새롭게 시도, 많은 이들에게 보다 생생하게 이들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번 전남여성생애구술사 스토리북과 영상생애구술사는 10월 말께 전남여성가족재단 홈페이지와 유튜브 공식 채널에서 만날 수 있다.

한편 전남여성가족재단은 지난 2011년부터 '전남여성생애사'와 '가고싶은 섬, 여성 이야기'를 통해 지역 여성들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있다. 지난 기록물은 전남여성가족재단 홈페이지 여성문화 아카이브에서 볼 수 있다.

김혜진기자 hj@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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