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순천 관경정

입력 2021.07.22. 18:51
'소작료 4할' 투쟁 이끈 순천농민운동의 산파 박병두

김홍도의 「타작」이라는 그림이 있다. 벼를 수확하여 타작하는 풍경을 그린 풍속화다. 등장인물은 일곱이다. 여섯은 대각선 아래 배치되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농민, 즉 소작농이다. 대각선 위쪽으로 볏 짚단에 비스듬히 누워 곰방대를 빨고 있는 한 인물, 옆에는 술병이 놓여있고 갓이 반쯤 벗겨진 것으로 보아 술이 불콰해진 마름 혹은 지주가 그려져 있다. 김홍도표 'X자 구도'로 유명한 이 그림은 지주와 소작인,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낯익은 작품이지만, 정작 그림의 대각선이 가르는 경계에서 더 깊이 들여다보이는 것은 '반타작(半打作)'이다. 지주 1명과 소작인 6명이 같은 비중으로 그려진 것은 소출도 이와 같이, 일하지 않는 자와 일하는 자가 반타작하고 있는 불공정한 현실을 단원은 보여주려 하지 않았는가 싶다.

지금은 쌀 소비가 줄었지만 먹을 것이 귀했을 때는 보통 한 사람이 한 석(石)을 먹었다. 1석은 도정한 쌀 144㎏으로 대략 두가마다. 간추리면 1인이 1년에 1석을 먹고, 1석은 1마지기의 생산량이며, 1마지기(200평)는 나락 1말로 농사짓는 면적이다. 그런데 소작료가 반타작, 즉 5할이었다. 여기에 지세 수세 등 갖은 명목으로 뜯기는 것이 많았으니 작인 한 가족이 최소 10마지기는 지어야 굶지 않을 정도였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면서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1920년대 산미증산계획을 통해 실시된 일제하 식민지지주제는 자작과 소작을 겸했던 '자소작농(自小作農)'의 몰락을 초래했고 조선 농민의 80%가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저미가정책(低米價政策)의 보전을 위해 국유지 소작료를 3할에서 5할로, 일반농지는 5할에서 6할로 인상했다. 지주들은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경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소작기간을 1년으로 단축, 갱신케 함으로써 생존권을 위협했다. 거기에 농감과 마름의 중간착취까지 더해졌으니 작인의 삶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작쟁의는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11월 소작인 1천500여 명이 고율의 소작료에 항거하여 농성을 벌인 황해도 흑교농장에서 시작됐다. 이듬해 4월 황해도 봉산에서 최초의 농민운동 단체인 '봉산소작인회'가 결성되면서 쟁의는 조직화되고 이후 곡창지대인 삼남을 중심으로 30여개 단체가 결성되면서 연대투쟁 성격의 소작인조합으로 발전하게 된다. 순천의 농민운동은 1922년 12월 서면지역 소작인들이 집단행동에 돌입하면서 불붙었다. '서면민요(西面民擾)'라는 관변용어로 불린 이 농민대회에는 1천600여명의 소작인들이 모여 투쟁에 들어갔으며 이후 순천 전역으로, 광양 여수 등 전남 동남부 일대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단원 김홍도 타작(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작료는 그 품질이 우수한 자에 대하야 총 수확의 4할 이내로 할 사(事). 지세 공과금은 지주가 부담할 사(事). 지주는 소작인에게 무상노동을 요구치 말 사(事). 지주는 …소작인을 멸시치 말 사(事).…' 1923년 1월23일자 『동아일보』가 전하는 당시 농민대회 결의사항의 일부이다. 소작료의 4할 관철, 제세와 비료대의 지주 부담, 소작권의 지속적 인정, 무상노역 강요 자제, 불량한 마름 퇴출 등 결의사항이 9개에 이른다. 여기에 '소작료를 두량할 때 사각두(四角斗)를 쓰지 말고 두봉(斗棒)을 사용할 것'이라는 조항이 나온다. 이는 소작료를 재는 되의 고봉(高捧)을 피하기 위함이다. 되질을 할 때 고봉을 깎아서 평평하게 치면 한 말에 4~5홉 차이가 난다. 그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이 조항을 넣은 것이니 '고봉'은 소작인에게 눈물어린 곡선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 볏짚은 소작인의 소유로 할 것, 소작료의 운송거리가 10리를 넘으면 지주가 부담할 것, 지주는 소작인을 멸시치 말 사(事), 이런 조항에 이르면 소작쟁의라는 것이 단순한 이익투쟁이 아니라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생존권 투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순천 서면 추동리, 들과 산의 경계에 아담한 누정이 하나 있다. 관경정(觀耕亭), 1905년 박병두(朴炳斗·1883~1936)가 지은 정자다. 그는 순천 서면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웠다. 누정은 대개 시와 술, 한담과 풍류가 오가는 '지주의 공간'이다. 이곳 역시 '농경을 관찰'한다는 뜻의 현판대로 들의 농사를 감독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여느 누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식민지배 이후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자 박병두는 이곳을 농민의 권익과 사회의식을 가르치고 일깨우는 강학소로 탈바꿈시켰다. 수많은 학습과 토론이 이뤄지면서 농민들은 깨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소작쟁의라는 집단행동에 돌입하게 된다. 그 무렵 박병두는 조선일보 순천지국장과 순천 서면청년회 부회장, 순천농민연합 집행위원 등으로 일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인물로 떠오른다. 그는 1922년 첫 소작쟁의를 주도한데 이어 순천 전역으로 농민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이어 조선 공산당원 김기수, 교사 출신으로 동아일보 기자로 일한 이영민, 여수 인민위원회 위원 이창수 등 공산주의자들과 비밀결사를 조직, 여수 광양 보성 등지의 농민·청년운동을 주도했다. 소작쟁의는 1922년 순천을 시작으로, 1923년 전남 동남부 및 영광군청 농민시위, 1923~24년 암태도 소작쟁의, 1925년 나주 궁삼면 동척과 신안 도초도 및 지도의 소작쟁의, 1926년 신안 자은도 소작쟁의로 이어졌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특히 유명한 것은 당시 600여 명의 농민들이 법원 앞에서 단식농성에 돌입, 조선인 변호사들이 무료변론에 나서고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등 전국적인 이슈로 떠올랐으며, 지주와의 협상 과정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4할 소작료'를 관철시키면서 쟁의를 승리로 이끌어 향후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박병두는 1924년 쟁의주도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5년에는 순천군수가 향교토지에 무리한 소작료를 징수하고, 일제의 수탈기관인 동양척식회사가 횡포를 부리자 농민들을 이끌고 시위를 벌였다. 그는 당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순천지역 책임자로 항일 농민운동을 벌이다가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휘말려 또다시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1930~32년까지 순천농민조합 위원장을 맡아 농민운동을 주도하다 두 차례 검거되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그는 1936년 거듭된 옥고와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향년 53세.

조선 후기와 구한말, 일제강점기, 어느 시대건 민중들이 잡초 같은 삶을 이어오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1920년대는 착취와 억압이 극에 달한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였다. 남자들은 징집과 징용으로, 여자들은 위안부로 끌려가던 때였으며, 농민들은 산 속의 화전민이 되거나 유리걸식하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했고, 수많은 민중들이 고향을 등진 채 만주와 러시아 등지에서 유랑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이 때 일어난 순천의 농민운동은 일제하 모든 지역의 민중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고 오래 지속된 운동으로 손꼽힌다. 순천 농민운동은 1922년 12월 서면의 소작쟁의를 시작으로 1934년 순천 농민조합의 공식해산에 이르기까지 12년에 걸친 민중운동이었다. '반타작'의 소작료, 실제로는 6~7할의 소작료를 '4할'로 관철시키려는 당시 소작쟁의 투쟁은 대지주들을 굴복시키면서 큰 성과를 이뤄내기도 했다.

사회주의자 박병두가 이끈 순천농민운동은 죽음으로 내몰린 작인들의 삶을 지켜내는 생존권 투쟁인 동시에 일제와 지주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민중의 자존(自存)을 지켜내는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농민운동사의 큰 의미를 갖는다.

순천 농민운동이 태동한 곳이며, 소작쟁의 관련 누정으로는 전라도에서 유일한 공간인 관경정은 해방 이후 농민들을 대상으로 문맹퇴치 교육을 하는 야학소(夜學所)와 마을주민들의 회의장으로 사용되었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병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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