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2부- 고흥 재동서원

입력 2021.05.13. 18:30
창랑의 흐린 물에 발을 씻었던 송간과 김시습

고흥의 재동서원, 주벽의 위패가 둘이다. 좌측이 '충강공 서재 송선생', 우측이 '청간공 매월당 김선생'으로 송간과 김시습이 나란히 서 있다. 재동서원은 주벽 2위 외에 좌우로 임진왜란 때 충신 9위와 효자 4위를 배향하고 있는 여산송씨의 문중사당이 그 뿌리다. 말하자면 송선생이 주(主)고, 김선생은 객(客)인 셈인데 무슨 연유로 김선생이 남의 집 안방에서 주인대접을 받고 있을까? 정승 허조(許稠)가 다섯 살 아이를 앞에 두고 "내가 늙었으니 '노(老)' 자를 가지고 시를 지어보라" 하기에, 곧바로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라고 답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패관잡기)는 '오세동자' 그 김시습 아닌가.

'의동도합 지우상추(義同道合 地又相醜)' 서원지의 매월당 봉안문에 나오는 대목이다. 실마리는 여기에 있다. '의가 같고 도가 합치하며 처지 또한 서로 비슷하니…' 이 원문 여덟 글자가 우리를 5백여년 전 '단종애사(端宗哀史)'의 시대로 인도한다.

'물은 곱고 산은 깊고 달은 밝사오니 하늘에 납신 임금의 영현이시여 내림하사이다. 가엾으신 성은이 망극하옵기에 석철을 본받아 임금의 의관과 궤장을 갖추어 단을 모아 제사 지내오니 회계산 위에 대우사의 제사의식을 인용함이로소이다. 산과와 천어를 차려 추부를 곡하며 눈물로 혼을 부르옵나니, 비록 예는 미흡하오나 의리는 있사옵기에 감히 청하나이다. 흠향하옵소서.'

예는 미흡하나 의는 있는 이 자리는 1457년(세조 3) 늦가을 계룡산 동학사. 신라가 고려에 망했을 때, 고려가 조선에 망했을 때 순국한 혼들을 위해 유불(儒佛)이 함께 제를 지내던 동학사는 그래서 동학사(東鶴寺)이기도 하고 동학사(東鶴祠)이기도 한 시대의 뒷문이었다.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은 그래서 동학사였다. 그곳에서 목숨을 걸고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영월호장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뒤 거두어 온 용포(龍袍)로 초혼하고, 김시습이 직접 쓴 제문을 읽고 있다. 뒤로 부복하니, 조상치는 영천에서, 송간은 여산에서, 이맹전은 선산에서, 정보는 연일에서, 조여는 함안에서, 권절은 안동에서 왔다. 이렇게 일곱을 '칠현' 혹은 엄흥도를 더해 '팔절'로 숭상한다. 계룡산의 숙모전, 재동서원 앞의 '단묘초혼칠현신비'가 그것이다. 당시 세조의 권세에 눌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 참담한 이야기는 세월이 흐르면서 잊혔다가 순조 때 동학사를 해체·복원하면서 대들보 속에 숨겨져 있던 기록을 발견하여 지금까지 전하는 것이다.

송간(宋侃)은 여산 출생으로 호는 서재(西齋),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세종 때 벼슬길에 올라 단종 때 가선대부로 형조참판을 지냈다. 1455년 단종의 명을 받아 호남을 순시하고 귀경하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스스로 관직을 버렸다. 고향 여산에 은거하던 중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자 강원도로 찾아간다. 단종이 피를 토하듯 구슬피 우는 자규(소쩍새)에 자신을 빗대 시를 지었다는 누각 자규루(子規樓)에 올라, 어린 옛 군주에게 절하고 복명(復命)하면서 통곡했다고 한다. 송간은 다시 귀향하여 두문불출했다. 그러다가 단종의 비보를 접하여 동학사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삼년복상을 마쳤다. 조정의 감시가 심해 이후 고향으로 가지 않고 남도 순무할 때 봐두었던 흥양(고흥) 마륜촌으로 내려온다. 세조가 형조판서 벼슬을 내리며 다시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뒷산에 정자 서산정을 지어 날마다 북향 배곡(拜哭)했다. 통음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술에 취하면 온 산천을 헤매고 떠돌아 동네에서 다들 미친 사람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은거지에 두 동생과 봉상시주부 벼슬을 살던 큰 아들 맹유, 부안현감을 지낸 둘째아들 중유, 셋째 아들 계유, 동복현감을 지낸 넷째아들 백유, 다섯째 아들 숙유 등이 모두 벼슬을 버리고 솔가하여 찾아오니, 송간은 여산송씨의 고흥 입향조(入鄕祖)가 된다. 재동서원에서 북으로 30리 올라가면 벌교에 백이산(伯夷山)이 있다. 주나라 백성을 거부하며 수양산에서 고사리로 연명하다 세상을 마친 백이의 이름을 딴, 송간은 그 산에 묻히고 싶었다. 후손들이 유지대로 그를 백이산에 묻었다.

계유정난 당시 김시습의 나이 21세. 3일간 통곡을 한 뒤 보던 책들을 모두 불사르고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한다. 법호를 '설잠(雪岑)'이라고 했다. '눈 덮인 등성이'라는 뜻이다. 그는 머리는 깎고 수염은 길렀는데 "삭발은 세상을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은 장부의 기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고 칭했다. 사육신이 처형되던 날 밤,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져 길가에 버려진 시신들을 누군가 수습하여 노량진 남쪽 언덕에 묻어주었는데, 그가 김시습이라고 전한다.(연려실기술) 집현전 학사출신에서 쿠데타 지지로 변절한 정승 정창손이 벽제소리를 앞세워 종로거리를 지나고 있을 때 술이 거나하게 취한 김시습이 거리로 뛰어나가 "너 이놈 그만 좀 해 먹어라"하고 불호령을 내리니, 정창손이 기겁을 하고 꽁무니를 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한명회가 한강 가에 화려한 '압구정'을 짓자 권신들이 이를 찬탄 아첨하는 시를 지었다. 한 현판에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고(靑春扶社稷)/ 늙어서는 강호에 누웠네(白首臥江湖)'라고 쓴 시가 있었다. 김시습이 붓을 들어 이렇게 고쳐 놓았다.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靑春危社稷)/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네(白首汚江湖)' 한명회가 나중에 알고는 현판을 떼어버렸다고 한다. 영원한 자유인이자, 철저한 디아스포라(方外人)였으며, 천재시인이자 뛰어난 사상가였던 김시습. 평생을 유랑하였던 그가 50대에 이르러 병든 몸을 의탁할 곳은 역시 절간뿐이었다.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부여) 무량사. 1493년 그곳에서 병사했다. 향년 59세.

왜 둘이 나란히 서 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둘은 다르면서 같다. 김시습은 시 2천여 수가 수록된 '매월당집'과 '금오신화' 등 방대한 저술을 남긴 반면에 송간은 '어떠한 시문도 남기지 말라'는 문중에 전하는 간찰 딱 한 문장을 남겼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만,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고 했던 굴원의 시처럼 두 사람, 시대의 흐린 물에 발을 씻었다는 점에서 같다. 계유정난 이후 벼슬을 초개처럼 던져버리고 세조의 조정에 복무하지 않았으며, 무참히 떠난 어린 영혼을 위로한 뒤 유랑과 통곡과 통음으로 여생을 양광(佯狂)한 점 등 절의 측면에서 둘은 다르지 않다. 뜻이 같으면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 서로 만난다고 한다. '의동도합(義同道合)'이 그런 뜻이 아닐까 싶다.

단종은 사후 241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 신규(申奎)의 상소에 의해 복위되었다. 김시습은 다시 80여년이 흐른 1782년(정조 6) 생육신에 포장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이때 성균관 유생 한덕보에 의해 '의동도합'한 송간의 충절도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송간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792년 자헌대부 의정부좌참찬 겸 지의금부사로 증직되고 '충강(忠剛)'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어 50여년이 흐른 1846년 '의동도합한 매월당 김시습을 동배(同配)'하라는 성균관의 통문에 따라 합설봉안하기에 이른다. 동학사에서 초혼제를 지낸지 389년 만의 일이다.

'어떠한 시문도 남기지 말라'는 송간의 유지 때문인지 후손은 무신들이 많이 나왔다. 재동서원에 배향된 송간의 칠세손 송대립·송희립 형제를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수군으로 참전, 순절한 후손들이 66명에 이른다. 이중 임란 때 무과에 급제한 송희립은 그 유명한 노량해전에 이순신 장군 막하로 참전했다. 충무공이 탄환에 맞아 전사한 직후 죽음을 알리지 않은 채 대신 깃발을 잡고 북을 두드리며 분투하여 마침내 적 함대를 격파시키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우리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그 인물이다.

서원을 나서는데 칠현신비가 우뚝하고 초록은 무성하다. 가슴 속에 고결한 뜻을 품었으되 반역의 시간 속에서 '길 없는 길'을 걸었던 두 사람. '산에 올라서는 웃고, 물에 다다라서는 통곡했네(登山而笑 臨水而哭)'라고 김시습은 시를 짓고 송간은 여전히 말이 없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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