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광주 북구 풍암정

입력 2020.08.20. 17:50
한 맺힌 두 형의 죽음, 김덕보 염세의 공간

조선의 시인 이달(李達)의 '제총요(祭塚謠)'다. 무덤에 제 지내고 읊는 가락이다.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없는 시'(호라티우스)라고 할 때 이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희고 누런 개 두 마리가 앞서 간다. 길 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서 있다. 저무는 들녘, 밭 사이 길을 따라 두 사람이 걸어간다. 늙은이는 젯술에 취기가 올라 아이의 부축을 받으며 집으로 가는 길이다. 평화로운 동양화의 한 장면 같다. 둘은 할아비와 손자다. 조-부-손(祖父孫) 3대 중에 가운데가 없다. 그가 무덤의 주인이다. 때는 임진왜란의 와중이니, 할아비가 왜 취했는지 알 듯하다. 홍주 관기의 몸에서 태어나 평생을 시와 술로 살았던 시인은 그저 무심한 풍경을 보여줄 뿐 말이 없다. 제사 음식을 얻어먹었을, 앞서가는 개 두 마리가 슬픔의 입구로 인도한다. 시인은 자기 몫의 슬픔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손상되지 않은 슬픔을 우리에게 오롯이 넘겨주고 있다. 칠언절구 시 한편으로, 7년에 걸친 전쟁의 비극을 이토록 깊게 묘사한 작품이 또 있었는가 싶다. '제총요'는 우리 한시의 백미라 할 것이다.

풍암정에 앉아 수레를 끌고 가는 풍암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늘 이 시가 떠오른다. 무등산 원효계곡의 하류.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가 하면 그의 핏빛 설움인가 싶고, 눈이 수북이 쌓인 겨울이 그윽한가 하면 그의 정한(情恨)인가 싶다. 봄볕이 들어 꽃들이 피어날 때 늙은 소나무 한그루, 여름 소나기에 계곡물 소리치며 흐를 때의 기암괴석들. 사철 수려하지 않은 때가 있을까만 그 속에 제총요의 비틀거리는 통한 또한 가득한 것이었으니, 그곳은 염세(厭世)와 은일(隱逸)의 공간이었다.

풍암(楓巖)은 조선 중기 의병장 김덕보(1571∼1627)의 호다. 큰 형이 덕홍, 작은 형이 덕령이다.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의 12대 손으로 담양에서 살다가 1470년경 광주 석저촌(지금의 충효동)으로 들어온 대지주 집안이다. 환벽당 주인 김윤제가 종조부여서 형제들이 어려서 문무를 익혔다. 1592년(선조25) 발발한 임진왜란은 이 가문에 천추의 한을 남긴다. 장형 덕홍은 그해 6월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의 막하로 참전했다. 그는 금산전투에서 호남을 치려는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고경명과 순절했다. 큰 아들이 떠난 한 달 뒤 노모가 세상을 버렸다. 상중에 덕령은 거병을 결심한다. 3년 상은 덕보가 맡기로 했다. 논밭을 팔아 무기를 마련하고 격문을 띄워 군사를 모집하니, 정병 1천여 명이 모였다. 고봉 기대승의 아들 기효증이 동참했다. 또한 덕령의 매형 김응회, 손위 처남 이인경, 고종사촌 김언욱과 문장이 뛰어났던 그의 아들 김존경, 사촌동생 김덕휴 등이 기꺼이 참전한다. 국난을 당하여 가문일족이 분연히 일어서는 모습, 훗날 광주시민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대목이다. 1593년 김덕령은 전라도 삼례에서 세자 광해군을 만난다. 그 앞에서 무예시범을 보이고, 지용을 인정받아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 선조로부터 초승장군의 군호를 받는다. 이듬해 3천명으로 불어난 의병을 이끌고 권율의 막하에서 곽재우와 함께 왜군을 수차례 격파했다. 10월 거제도의 왜군을 수륙으로 공격할 때 선봉장으로, 1595년 고성에 상륙하는 왜적을, 기습 격퇴하였다. 김덕령은 영남 서부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결과적으로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하는 공을 세운 것이다.

풍암정

1596년 7월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몽학은 전주이씨 서얼로 난을 일으킨 지 닷새 만에 부하에 의해 살해되었고 난은 평정되었다. 김덕령은 진군했다가 진압소식을 듣고 돌아온다. 이 때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무고를 받아 최담령, 곽재우, 홍계남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선조는 그를 6회 친국하였다.

'상이 직접 국문하였다. 덕령은 억울함을 사실대로 답변했고 증거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유명해진 까닭에 이시언 등의 시기를 받았다. 조정은 그의 날쌔고 사나움을 제어하기 어렵다고 의심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상의 뜻도 역시 그러하였는데…

유성룡, 최황 등은 "그는 살인을 많이 했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며 조금도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김택룡은 "국가가 차츰 편안해지는데 장수 하나쯤 무슨 대수입니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하여 사람들의 웃음을 샀다.

덕령은 수차례의 형장 신문에 드디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졌는데도 조용히 변론하며 말씨가 흔들리지 않았다. "신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가 있습니다. 계사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에 삼년상의… 칼을 짚고 분연히 일어나 여러 해 종군하였지만… 신은 지금 다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용사 최담령 등이 죄 없이 옥에 갇혀 있으니 원컨대 죽이지 말고 쓰도록 하소서"라고 했을 뿐…'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8월1일의 기록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신(臣)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장이 되었고, 군(君)은 백성과 산천을 버리고 도주했다. 군신의 길이 상반된다. 신이 충(忠)이면 군은 역(逆)이 되는 형국이다. 왕으로 복귀하려면 충이 역이 되어야 하니… 선조는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즉시 처형하여 후환을 없애자는 말이 그 맥락이다. 도적 떼의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덕보는 성문 밖에서 기다렸다. 형이 '1차 옥사(노복 장살)' 때 무사 방면되어 이번에도 그러리라 기대했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20여일 만에 형이 나오는데 주검이었다. 정강이뼈가 다 부러져 다리가 너덜너덜하다. 죄명은 역적, 충의 대가는 장살(杖殺)이었다. 형을 수레에 싣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는 길, 열하루를 걸어 광주로 가는 통한의 길. 덕보의 뒷모습은 제총요 할아비의 굽은 등과 닮아있다. 김덕령(1567∼1596)은 무등산 자락에 묻혔다. 향년 30세. '춘산(春山)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그의 절명시조 '춘산곡'이 전한다.

김덕보는 세상이 싫어 은둔하였다. 지리산과 여러 곳을 떠돌다 고향에 돌아와 이곳 계곡 옆에 정자를 지었다. 골기와 팔작지붕에 재실을 한 칸 넣었다. 풍암정이다. 풍암은 흐르는 물과 떠도는 구름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며 칩거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연로하여 전장에 나가지는 못하였다. 풍암은 그해 11월 한 많은 세상을 뜬다. 향년 56세.

덕령의 아들 광옥은 익산 외가에서 본관을 광산에서 용안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부인 이씨는 정유재란 때 왜군의 겁탈을 피해 자결했다. 덕령이 죽음에서 구한 부하 최담령은 겁보인 체하며 폐인 노릇을 하였다. 덕령의 매부 이인경도 칭병하며 생을 마칠 때까지 은거했다. 사람들은 그가 은둔한 채 쓰여지지 않음으로써 수명대로 살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실록에는 이런 대목도 전한다. '남도의 군민들은 항상 그에게 기대고 그를 소중하게 여겼는데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

김덕령은 1661년 신원되고, 1678년(숙종 4)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다. 영조 때 의열사에 형 덕홍, 아우 덕보와 병향(竝享)되었다. 1974년 광주 충장사를 복원하여 그의 충훈을 추모하고 있다. 한편 후궁 출신의 서자로 백성을 버린 군주이며, 조선 27대 왕 가운데 고종과 더불어 가장 무능했다는 평가를 받는 선조는 김덕령 사후 12년만인  1608년 독살설의 의혹 속에 흙이 되었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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