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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광주 남구 ‘오방 최흥종 기념관’

입력 2020.08.06. 17:06 수정 2020.08.06. 17:45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20세기 광주의 성자


1909년 목포에서 광주로 올라가는 길. 길가에 드문드문 진달래가 색을 드러낸 쌀쌀한 초봄이었다. 한 벽안의 선교사가 말을 타고 급한 길을 재촉하고 있다. 미국 켄터키 출신으로 웨스트민스터 대학을 졸업한 윌리 해밀턴 포사이드(36). 목포 진료소에서 의사로, 선교사로 일을 하다가 동료 선교사(오웬)가 급성 폐렴에 걸렸다는 전보를 받고 왕진가는 길이다. 최흥종(29)이 영산나루까지 마중을 나갔다. 둘은 광주로 오던 도중 지금의 효천역 근처 산자락에서 누군가와 맞닥뜨리게 된다. 피고름으로 범벅인 누더기를 걸친 채 추위에 떨며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던 여인. 포사이드는 말에서 내려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주었다. 그리고 그녀를 말에 태워 데리고, 두 남자는 걸어서 양림동 광주진료소까지 온다. 그녀는 나병환자였다. 이 비범한 일은 평범했던 한 사람의 일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오방 최흥종(崔興琮 1880~1966), 광주 불로동에서 부유한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행복한 유년은 아니었다. 어릴 때 형이 죽고, 5세에 어머니를 여읜 후 엄한 계모 밑에서 자랐다. 19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청년 최흥종은 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광주의 무쇠주먹'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장바닥과 뒷골목을 주름잡는 깡패였다. 개화기이던 그 무렵 광주 양림동에 첫 기독교 문물이 들어온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 유진 벨과 오웬이 '광주양림리 교회'를 설립한 것이 1904년, 그의 나이 스물넷이다. 최흥종은 선교사의 집에 드나들면서 인생을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해 크리스마스 광주 최초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기독교 입문을 결심하게 된다. 그는 생업을 위해 전남 경무청에 순검으로 취직하기도 했고, 광주농공은행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 후 1907년 창설된 광주제중원(광주기독병원)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게 된다. 1909년 포사이드와의 숙명적 만남으로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아 평생을 나병 퇴치운동에 바치기로 마음먹은 것이 그 즈음이다. 당시 '선교사가 문둥병자를 데려다 치료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양림동은 밀려드는 나환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최흥종은 나환자 진료소 설립을 위해 자신의 땅 1천 평을 기증했다. 1912년 광주시 효천면 봉선리에 한국최초의 나병 전문병원인 '광주나병원'은 이렇게 개원된 것이다.

오방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919년 밀명을 받고 광주에 온 김필수 선생을 만나 광주지역 3.1운동 거사의 총책을 맡는다. 오방은 이 일을 협의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시위 도중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1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21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한 뒤 본격적인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광주 YMCA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눈부신 사회운동을 벌여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문맹률 90%에 달했던 여성과 농민을 위한 야학을 열어 문맹퇴치 운동에 나섰고, 무등산 골짜기에 토담집을 지어 폐결핵 환자들의 마지막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빈민구제를 위한 사회연대 활동을 이끌었다. 태평양 전쟁으로 의사가 태부족하던 당시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에 100여 명의 학생을 모집,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의전이 1944년 개교한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이다. 1927년 좌우합작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맡아 일제에 맞선 격렬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회장으로 추대돼 광주서중 교정에서 "모두 단결하여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하자"는 연설을 하는 정치가로서의 일면도 보여준다.그는 근대 개화기 우리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선각자로서 눈부신 족적을 남겼다. 그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역시 '나환자의 아버지'로서의 오방이다. 봉선리에 나병원이 설립되자 환자들이 밀물처럼 몰려 한때 1천여 명에 달했다. 당시 나환자는 돌팔매질을 받던 기피의 대상이었다. '봉선리 밭에서 난 채소에 문둥이 균이 붙어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곳은 거센 항의를 받는다. 1926년 광주나병원은 여수 애양원으로 이전하게 된다. 1932년 오방은 김병로, 송진우, 조만식 등과 '조선나환자근절협회'를 창설한 뒤 그들의 치료와 생계대책을 조선총독부에 요청하였다. 그것이 묵살되자 오방은 행동에 나섰다. 그는 150여명의 나환자들과 함께 광주를 출발하여 경성까지 걸어간다. 나환자를 구제한다는 뜻의 '구라대행진(救癩)'. 이 소식을 들은 나환자들이 가는 길마다 결합하여 그 수가 계속 불어났다. 11일 만에 경성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5백여 명에 이르렀다. 총독부는 내다보지도 않았고, 그들은 7시간 동안 연좌농성을 벌였다. 경성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나환자들의 시위는 그 자체가 무기였고, 공포였다. 결국 우가끼(宇垣) 총독은 손을 들고 오방과 면담한다. 소록도를 나환자의 수용시설로 할 것, 나환자의 단종(斷種, 본인 의사와 무관한 불임수술) 폐지 등 오방은 두 가지 확약을 받아냈다. 소록도는 당시 일본군 휴양소였고, 나환자 1백여 명을 수용하는 작은 자혜병원이 있었다. 이 병원이 해방 무렵 6천여 명의 나환자들을 수용하는 대규모 치료시설로 바뀌었고, 정부수립 이후 국립 소록도병원이 된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한국은 1999년 WHO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나병구제 국가로 선정된다.

오방(五放)은 불교의 방하착(放下着)처럼 '다섯 가지를 놓아버린다'는 뜻이다. 가사에 방만(放漫), 사회에 방일(放逸), 경제에 방종(放縱), 정치에 방기(放棄), 종교에 방랑(放浪). 만(漫)은 질펀함, 일(逸)은 나태, 종(縱)은 늘어짐이다. 기(棄)는 돌보지 않음이고, 랑(浪)은 유랑이다. 오방은 스스로 지은 호이면서, 자경문과 같다. 오방은 마하트마 간디의 '일곱 가지 사회악'을 떠올리게 한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富), 양심 없는 쾌락, 품성 없는 지식, 도의 없는 상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종교. 최흥종의 오방은 스스로를 향하여, 간디의 칠악은 사회를 향하여, 엄격한 지계(持戒)의 선을 긋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상통한다.

오방은 나환자들의 삶이 어느 정도 정착되자 증심사 골짜기에 오방정(五放亭)을 짓고 은거한다. 이 오방정이 1930년대 2.8독립선언의 핵심인물 최원순이 은거했던 석아정(石啞亭)이기도 하고, 오방의 지기 의재 허백련의 춘설헌(春雪軒)이기도 하다. 김구 선생이 오방정에 찾아와 함께 정계로 나아가자고 권했지만 그는 영원한 자유인으로 남았다. 1966년 오방은 "이제 살만큼 살았다"고 선언하며 죽음을 향한 단식에 돌입했다. 목사이면서 직선으로 긋는 선사(禪師) 같다. 단식 95일 만인 그해 5월14일, 이 땅에서의 아름다운 여행을 마치고 하늘로 떠나갔다. 향년 86세. 그의 영결식은 광주시 첫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날은 5.18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환자들이 찾아와 그를 아버지라 부르며 오열했다.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광주광역시와 남구청은 광주YMCA 창립 100주년이던 지난해 양림동에 '오방 최흥종 기념관'을 세웠다.광주 최초의 목회자로, 독립운동가로, 사회운동가로, 나환자의 아버지로, 영원한 자유인으로… 한 생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오방. 그의 여정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가쁜 숨이 차오른다. 그의 삶은, 오늘날 기독교는 무엇이며, 종교는 우리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그는 광주가 낳은 '20세기의 성자'였고, 아마도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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