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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그림이 있는 남도의 다락집- 나주 벽류정

입력 2020.06.09. 10:10 수정 2020.06.11. 18:24
무심코 한걸음, 백척간두 진일보

강온(强穩)은 갈림길이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역사는 늘 이 길 위에서 쓰여졌다. 갈림길에서는 하나를 취하여 가야한다. 그 길은 외길이다. 외길을 걷다보면 다시 갈림길이 나온다. 그 갈림길은 처음에 만났던 갈림길과 다르지 않다. 다시 하나를 버리고 가야한다. 갈림길은 외길로 이어지고 외길은 갈림길로 연결된다. 외길과 갈림길의 순환은 필연이다. 강온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테제이다. 1636년 겨울 남한산성 앞에 갈림길이 놓여있다. 이 길이냐, 저 길이냐? 화친이냐, 항전이냐? 김상헌은 척화(斥和)하고, 최명길은 주화(主和)한다. 인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59일을 흘려보낸다.

도(道)에도 갈림길이 있는가? 유학에서 도에 이르는 길은 두 갈래다. 세상사가 원래 한 길만 있을 수는 없다. 경도(經道)와 권도(權道). 경도는 보편타당의 원칙이고 권도는 임시방편의 예외이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고 했으니 둘은 양립할 수밖에 없다. '맹자'에 나온다. 순우곤이 남녀가 주고받기를 직접 손으로 하지 않는 것이 예입니까? 하니 맹자,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 제수가 우물에 빠지면 손으로 구해야 합니까? 하니, 구하지 않는 것은 짐승과 다름없다, 남녀가 주고받기를 친히 하지 않음은 예이나, 제수가 물에 빠졌다면 손을 잡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손을 잡지 않음이 경도이고, 때에 따라 손을 잡는 것이 권도라고 맹자는 설명한다. 예의지국 조선이 명과 신의를 지키고 오랑캐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김상헌의 경도이다. 종묘사직이 멸망할지도 모르는 이 위기에서 굴욕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 최명길의 권도이다. 이 갈림길을 표현하는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한 대목. '말의 길은 마음속으로 뻗어있고 삶의 길은 땅 위로 뻗어 있다. 삶은 말을 온전히 짊어질 수 없고 말이 삶을 모두 감당해낼 수도 없다. 말의 길과 삶의 길을 이으려는 인간의 길은 흔히 고통과 시련 속으로 뻗어있다. 이 길은 전인미답이고 우회로가 없다.'

유월의 녹음이 짙다. 때는 바야흐로 망종(芒種)이라, 들에는 보리가 나오고 볏모가 들어간다. 농사일이 하도 바빠서 발등에 오줌 싼다고 하는 때다. 남도를 사선으로 흐르는 영산강이 영산포에 이르러 정남으로 샛강을 하나 내어주니 금천이다. 금천은 나주 세지면, 나주평야의 끝자락을 적신다. 그 들판과 샛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벽류정(碧流亭)'이 있다. '들을 건너는 나룻배 한척 왼 종일 비껴 서 있네(盡日常橫野渡舟)', 누정에 걸린 나해봉의 시다. 너른 평야에 솟은 언덕, 그 위에 지붕을 얹은 누정 하나가 먼 하늘에서 보면 호수에 떠 있는 일엽편주와 같다는 말이다. 땅에서는 들판인 것을 눈길을 하늘로 들어 올리니 시가 되었다. 세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조주의 별서 터였는데, 외손 김운해가 이어받아 1640년(인조18) 지은 것이다. 정면 측면 각 3칸 단층으로 가운데 방을 놓고 사방을 마루로 두른 목조 팔작지붕이다. 처마에 30척 길이의 통나무를 사용하여 흐름이 유려하다. 주변에 대나무와 느티나무 고목이 어우러져 있고 빼어난 경관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민규호, 신헌의 현판과 김수항의 정기 등 11개의 현액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나주 벽류정

김운해(1577~1646)는 1608년(선조41)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무신이다. 그러나 광해군 15년 동안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 공을 세워 통정선전관에 오른다. 이듬해 이괄의 난 때 선조의 어가를 호위하여 공주로 내려간 공으로 가선대부가 된다. 1633년 충청도 조방장(助防將) 등 여러 무장의 직을 거친 뒤 김해부사를 끝으로 은퇴했다. 그 무렵, 병자호란이 끝난 1639년, 청은 명을 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구했다. 김상헌은 파병불가 상소를 올린다. 화가 난 청이 김상헌의 압송을 요구하니 조선은 그를 내어준다. 1640년 만주 심양으로 압송되어 4년간 옥고를 치른다. 1차 해금되어 용만(신의주)에 억류 되었다가 평안도 의주에서 다시 2년간 투옥된 뒤에 풀려난다. 심양에 있을 때 청인들의 회유와 협박이 있었지만 김상헌은 굽히지 않았다. 청인들은 그를 의인으로 여겨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김운해가 김상헌을 찾아간다. 김상헌이 1차 해금되어 신의주에 머무를 때다. 나주에서 신의주까지 수 천리 먼 길을 간다. 당시 김상헌은 죄인으로 처지가 곤궁하였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도 다 등을 돌리고 아무도 찾지 않을 때다. 두 사람은 서로 면식이 없었는데 김운해가 홀연 길을 나선 것이다. 그 길에 이해득실이 있을 수 없다. 아마도 김운해는 김상헌을 흠모하지 않았나 싶다. 김운해는 김상헌을 만나 흉중의 마음을 시로 전한다. 그가 절구를 남겼는지, 율시를 남겼는지는 모르되 딱 오언 두 행이 전한다. '영위소무고 막작이릉영(寧爲蘇武苦 莫作李陵榮)' 소무의 고통을 당할지언정 이릉의 영화는 누리지 말라. 소무는 흉노에 인질로 잡힌 한나라 사신이다. 온갖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끝내 변절하지 않는다. 소무는 북해로 연금되어 양치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릉은 소무의 벗으로 무장이다.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가 대패한다. 포로로 잡힌 뒤 투항하여 영화를 누린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받게 되며, 이 이야기가 '사기'에 전한다. 김운해는 김상헌을 소무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김상헌이 6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한양에 돌아와 있을 때, 김운해는 다시 한 번 그를 찾아간다. 그렇게 두 사람은 두 번을 각별하게 만났다.

훗날, 김운해와 김상헌이 흙으로 돌아간 지 30여년이 흐른 1678년 가을, 김운해의 손자 둘이 김상헌의 손자를 찾아간다. 김상헌의 손자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김수항이다.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의 미움을 사 영암(낭주)에 유배되어 있을 때다. "조부가 대나무로 지은 벽류정이 무너져 고쳐지었으니 중수기를 써 달라"는 부탁을 한다. 김수항이 "선대의 정의(情誼)를 바꾸지 않아 기쁘다"면서 흔쾌히 글을 지은 것이 남아있다. '조부께서 서울로 돌아오심에 공이 석실로 찾아와… 내가 어린 나이에 옆에서 보니 공이 이미 늙었으나 오히려 격앙하고 강개함이 있었으며 미간에 장엄한 기운이 왕성하여…' 김운해가 두 번째 서울로 김상헌을 찾아 갔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어린 손자가 기억을 되살려 쓴 중수기의 한 대목이다. 조손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길은 지금도 두 갈래다. 강경과 온건, 경도와 권도, 말의 길과 삶의 길. 두 길에 선악은 없다. 오직 실존과 생존이 있을 뿐. 1637년 1월30일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항례를 올린다. 그는 우리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말하는 권도의 길을 갔다. 그 갈림길에서 김상헌은 경도에 섰고, 김운해는 그 길을 흠모했다. 가고자 했으되 가보지는 못한, 역사에서 비껴서 있는 미답(未踏)의 외길. 그 알 수 없는 길이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이따금 빛을 발하곤 한다. 글=이광이 시민전문기자·그림=김집중

글 : 이광이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그림 : 김집중

호는 정암(正巖)이다. 광주광역시 정책기획관 등 공직에서 30여년 일했다. 지금은 고봉 기대승선생 숭덕회 이사로 활동하면서 틈틈이 강의도 한다. 고교시절부터 한국화를 시작하여 끊임없이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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