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집안 4대 4인 기록
100년 이어진 희생·투쟁 복원
자료·증언·소설적 상상력 가미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행복의 뒤에는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수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도 있다.
최근 나온 전용호 소설가의 '역사에 헌신한 의인 가족 4대'(문학들刊)은 전라도 함평의 이씨 집안 4대에 걸친 4인의 기록이다. 가장 윗대는 조선 수군 동첨절제사(종4품) 이태형(1841∼1894) 장군이다. 장군은 관군의 신분으로 동학농민전쟁 당시 함평 농민군을 이끌고 후 나주성을 함락하기 위한 고막포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부상을 당한 후 동료 관군의 밀고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둘째는 아버지 이태형 장군을 밀고한 관군을 추적하여 결국 죽임으로서 원수를 갚은 이태형 장군의 아들 효자 이충범(1869∼1926)이다. 셋째는 이충범의 아들로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농지개혁에 공헌한 이성우(1897∼1965)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이다. 넷째는 이성우 의원의 아들로 1960년대부터 함평과 광주에서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해온 이일행(1931∼2006) 선생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민중운동으로 평가되기 전까지 이태형 장군은 관군의 신분으로 반란군에 가담한 국가의 죄인인 소위 '역적'이었다. 아들 이충범은 아버지를 체포하여 처형시킨 동학토벌대를 끝까지 찾아내어 척결한 의인이지만 살인자였다. 그로 인해 가족 친지들은 상당한 세월 동안 국가권력의 추적과 세상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장군의 손자 이성우 의원이 소작 농민들에게 농지를 나눠주는 선행을 펼쳐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집안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일행 선생도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현장에서 활동했다. 그동안 동학농민전쟁이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으로 평가되어 이태형 장군이 역사의 전면에 복귀할 수 있게 됐다. 책은 자료와 지인들의 증언으로 기록됐다. 이성우 의원과 이일행 선생은 증언할 수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태형 장군과 이충범 어르신은 100년을 뛰어넘는 세대의 분들이라 증언을 해주실 분이 없을 뿐 아니라 자료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이태형 장군은 당시 관군의 신분으로 동학혁명에 참여했기에 이름을 숨기셔서 황현의 '오하기문' 등 동학관련 역사기록에 "이○○", 혹은 "이은중" 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충범 행적도 황현의 '오하기문'에 8줄의 기록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태형 장군과 이충범에 관한 내용은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집필되었다.
이태형 장군의 족보를 살펴보다가 찾아낸 것은 임술민란이라 부르는 1862년 함평농민항쟁의 주모자로 처형을 당한 6인 중 이방헌(1824∼1862.6.4)과 관계였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이태형 장군을 양자로 받아들인 백부 원헌(1813∼1869)과 이방헌 둘 다 밀양 손기채의 두 딸과 결혼을 해서 처가 편에서 동서를 맺었다. 방헌은 원헌의 양자가 된 이태형에게 이모부였다. 1862년 함평민중항쟁으로 이모부 이방헌이 처형을 당할 때 이태형은 만 22세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1862년 4월 16일, 함평 14개의 향촌민 7천여명이 죽창과 깃발을 들고 장시(場市)에 모여 궐기했다. 당시 함평 인구는 노비와 어린이를 제외하고 7천여 호, 2만 5천여명이었다. 한집에 한명이상 항쟁에 참여한 셈이었다. 이방헌 이모부가 주도하고 있는 항쟁에 22세 혈기 방장한 이태형이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이태형 장군과 효자 이충범 어르신의 삶을 복원했다.
지난 20일 오후 이홍길(전남대 명예교수),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이명한(소설가), 원순석(5·18기념재단 이사장) 등 주도로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전용호 소설가는 1978년 전남대 재학 시절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했다. 지난 2017년 5월민중항쟁의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개정증보판, 황석영·이재의·전용호 공저)를 집필,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1998년 신춘문예 소설로 등단, '미완의 일기' 등을 펴냈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 대장간에 남아 있는 우리의 모습 "누군가 기록해두지 않으면 영영 사라질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이 쌓여 이야기가 되고, 역사가 된다. 이 책의 귀함과 무게가 거기에 있다."한때 서울 을지로 7가는 대표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랬던 대장간들이 1970∼80년대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이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장간 셋이 붙어 있는 인천 도원동이 국내에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라 할 수 있다.도원역 부근에 있는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중 맏형 격은 1938년생 최고령 대장장이 송종화 장인이 운영하는 인일철공소다.책 '대장간 이야기'는 사라져가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장인 대장장이와 대장간의 모든 것을 담았다.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을 누빈다.역사 속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저자는 또 대장간이 우리말의 아주 오랜 곳간임에 틀림 없다고 말한다.이 책에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군에 건넨 선물 중 휴대용 불붙이는 도구 부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당시 이순신 장군이 부시를 일컬어 적었던 화금(火金)은 불을 일으키는 쇠라는 말이다. 부싯돌을 쳐서 불을 일으키는 쇳조각이 부시인데, 그 어원을 따져보면 불과 쇠가 합쳐져 이뤄진 말이다.이 책은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우리 대장간과 대장장이의 세계를 현장에서 관찰하고 정리한 결과물이다. 대장간과 관련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대장간의 인문학적 향기를 다양한 관점에서 드러내고자 애썼다"고 말하는 저자는 대장간 현장과 거기서 일하는 대장장이들, 나아가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연장들을 사용하는 우리 삶의 현장 속을 누빈다. 또한 역사 속에서 대장장이들이 어떻게 그려졌는지, 대장간이나 대장장이는 우리 문화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도 살핀다. 이 책은 우리나라 대장간 다섯 곳, 일본의 다네가시마 대장간 한 곳의 현장 모습을 보여준다. 인천의 도심 한복판에 있는 네 곳 등인데, 이제는 모두 70대 이상의 노인 혼자서 일한다. 젊은 누구도 대장간 일을 배우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 대장장이들이 일을 그만두면 그 대장간들은 영영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저자는 아쉬워한다.뭐니 뭐니 해도 가장 고마운 건 이때껏 대장간 현장을 지켜내온 이 땅의 나이 드신 대장장이 장인들이다. 힘에 부칠 때마다 대장간 현장을 찾아 그분들의 망치질 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고는 했다.대장장이와 도구, 그리고 쇠. 대장간의 3요소라고 할 수 있다. 대장장이가 있어야 쇠를 달구고 두들겨서 뭔가를 만들 수 있다. 원자재인 철물이 없어도 대장간은 돌아가지 않는다.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원재료인 쇠 말고도 화로, 모루, 망치, 집게 같은 필수 도구가 있어야 한다. 대장간 일은 쇠를 불에 달구는 작업이 우선이다. 화로에는 풀무가 따라붙는다. 바람이 없으면 화로에 불길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대장간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성냥이다. 충청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대장간을 승냥깐이라 한다. 이 승냥이라는 말이 성냥에서 나왔다.최민석기자 cms20@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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