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탐구자와 걷는 도시건축 산책

[공간탐구자와 걷는 도시건축 산책 ➆] 광주 푸른길

입력 2021.03.25. 18:05 김혜진 기자
아쉽지만 자랑할 게 더 많은 애정 가득한 길
남광주 보도교를 지나 백운광장에 이르는 2021년의 광주 푸른길에는 기찻길의 시간과 산책길의 시간의 지층이 쌓여있다.

 ◆ 우리도시 예찬

1990년대 말부터 한국 여러 도시에서는 기능을 다 한 공장, 창고, 철도, 군사시설 등 많은 산업유산들의 변화가 필요해졌다. 이에 따라 '이 장소들이 어떻게 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창조적인 디자인 접근 방식은 2000년대 건축계에서는 중요한 화두였다. 필자는 2001년 건축학과에 입학해 3학년이 되던 해에 처음으로 건축설계공모전에 참가했다. 그때 설계했던 공간이 현재 광주 푸른길인 폐선 부지였다. 그 해 공모전을 준비하면서 읽었던 김진애 건축가의 '우리도시 예찬'이 아주 많이 기억에 남는다. 어떤 건축물이나 장소에 대한 날선 비평의 글들에 익숙했던지라, 우리 도시를 따뜻한 시선으로 예찬하고 있는 이 책이 참으로 즐겁게 읽혔던 기억이다. 이 책에서 김 건축가가 '광주의 비취 목걸이로 다시 태어나리라'며 예찬했던 그 길은 20년이 지나 한국의 모든 폐선로의 롤 모델, 모범답안, 프로토타입을 제시하며 광주의 자랑이 됐다.

2021년 새롭게 쌓여지고 있는 백운광장 푸른길의 시간

◆ 푸른길의 사건들(event)

푸른길의 탄생과 조성과정에는 여러 사건들이 있다. 그 중 한국 폐선부지 조성의 선도적 사례로서, 각 지자체에서 사례답사를 해갔던 광주 푸른길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가장 아쉬운 점은 디자인의 유약함이다. 광주시는 너무 성급했다. 폐선 부지를 푸른길로 만든다는 근사한 결정과 함께 철도를 걷어내 버렸고, 근대건축물 보존 대상으로 문화재청에서 지목했던 남광주역마저 철거해 버렸다. 이리 빠르게 없애버리지 않았더라면, 이것들을 활용해 철도시설이었던 장소의 기억을 감각적으로 디자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2002년에는 광주비엔날레 공공예술 '프로젝트4 Connection'을 통해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광주 폐선부지 활용에 대한 디자인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사건도 있었다. 이는 실제 디자인에는 반영되지 못하고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버렸다. 우리 집 앞 천변 자전거 산책길과 사뭇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던, 2010년에 방문했던 거의 완공된 푸른길의 풍경 앞에서 디자이너로서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광주 푸른길은 아쉬운 사건들보다는 자랑할 사건들이 더 많다. 그중 제일은 시민들의 폭넓고 깊은 관심과 참여이다. 모든 디자인 산물은 그 디자인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아야 성공한 디자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디자이너의 선도적인 미학적 견해가 들어간 정성스러운 작품일지라도 사용자에게 외면받는 디자인은, 공간은 의미가 있을까?

광주 푸른길, 언제 방문해도 그곳엔 시민들의 애정이 느껴진다. 방문할 때마다 푸른길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벤트들은 공간의 스케이프(scape·경관)를 너무나도 풍성하게 해준다.

우리 집 앞, 대전의, 대구의, 여느 자전거 산책길과 고정된 건조물의 풍경이 유사하면 어떠리. 그곳의 사람들과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이 내가 가 본 그 어느 자전거 산책길보다 다채로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는 것을.

2010년, 공원 전체 디자인과 상관없이 전시되었던 남광주역의 기차 한토막은 시간이 지나 좀 더 자연스럽게 철로였던 시간의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진화하였다.

◆ 시간의 지층

21세기 산업유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은 장소의 '시간성'을 디자인으로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0년 필자가 푸른길을 방문했을 때, 푸른길의 시간을 담는 방식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조선대 정문 맞은편 푸른길에는 철로 부분토막이 공원 전체 디자인과 맥락 없이 전시돼있었다. 2010년 지하철 2호선 계획과 남광주역의 역세권 개발 등 여러 행위주체의 갈등으로 잠시 공사가 멈췄다. 그 갈등의 유예시간 덕분이었을까.

잠시 멈춰 호흡을 가진 후 써나간 2013년의 푸른길 남광주 구간에서 발견되는 시간의 지층은 2010년보다는 조금 더 진화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2010년의 남광주역 또한 조선대 정문 앞 철로 한 토막처럼, 여기에 기차역이 있었다는 표지판과 기차 한 토막이 전시돼 맥락 없는 시간의 경험을 강요했다면, 현재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들이 공존하고 있다. 시민들을 위한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삽입돼 훨씬 더 풍부하고 자연스러운 시간의 지층을 경험할 수 있게 진화했다. 지상으로만 이어지던 푸른길이 남광주역을 지나 공중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 풍경 또한 좀 더 다층적인 푸른길의 스케이프를 느끼게 했다.

2011년 완공된 남광주 보도교는 다층적인 푸른길의 풍경을 느끼게 해준다.

◆사이트의 힘, 발견의 디자인에 대한 기대

지난해 백운 고가다리가 철거됐다. 고가다리 위아래 엄청난 규모의 차량 통행으로 끊겼던 푸른길이 올해 12월 새롭게 이어지려고 한다.

푸른길 공원 조성 계획안은 그 동안 아쉬웠던 디자인의 유약함을 극복하리란 기대감이 크다. 푸른길에서 조금 넓은 공간을 가진 광주역, 남광주역, 장산초교 앞, 효천역 부근이 수목과 벤치로 조성된 폭 10m 안팎의 철로 구간의 푸른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점이 아쉬웠는데, 백운광장은 조금 다른 스케이프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디어 콘텐츠 활용과 각종 전시회 개최가 가능한 문화광장 등으로의 변신이 예고됐다. 또한 백운광장 주변의 푸른길에는 스트리트 푸드존과 로컬푸드 직매장, 전기차 충전시설 등을 갖춘 스마트 주차장도 계획됐다. 강가에 펼쳐진 가게로 들어가 잠시 머물러 그 풍경을 여유롭게 즐기는 유럽의 천변길처럼, 푸른길도 길 가다 머무르고 싶은 공간이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 같다.

올해 끝자락, 이 새로운 시간이 덧입혀지면 지금보다 더 시민의 사랑을 받는 공간으로, 활기가 넘치는 공간으로, 더 다양한 지역의 광주 시민들이 찾는, 다양한 시간의 스케이프를 공존하게 될 푸른길의 새로운 모습이 너무 기대된다. 시민들의 사랑과 관심이 끊이지 않는 한, 광주 푸른길은 2021년을 넘어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다.

강효정

전남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건축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2012년에 발표한 박사논문 ‘랜드스케이프 어바니즘 관점으로 본 한국의 건축·도시·조경설계 연구’ 등 건축, 도시 경관(landscape)을 주요 관심 주제로 꾸준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건축 디자인 실무를 수행하면서 동시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중심으로 하는 광주 구도심을 비롯한 푸른길, 광주 폴리(folly) 등 광주 지역 도시 공간과 사건(event)에 대해 꾸준히 집중하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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