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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지행의 세상읽기

인문지행의 세상읽기- 독립운동가 최재형, 동토에서 난로의 삶을 살다

입력 2019.11.14. 11:28 @양기생 gingullove@srb.co.kr
우스리스트 4월참변추모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이 모두가 방향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요즈음이다. 이럴 때 가장 큰 위험은 세상에 대한 원한과 냉소만 깊어지고 급기야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갈 수 없다면 잠시 뒤돌아 가보는 것이 최선이다.

몇 분들과 연해주를 다녀왔다. 연해주는 러시아 땅으로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한반도와는 아주 가까운 블라디보스톡 주변 지역이다. 오랜 동안 금지구역이었던 블라디보스톡은 지금은 서너 시간이면 도착하는 편리함 때문에 과하게 빠른 속도로 ‘뜨는’ 관광지가 되었지만, 사실 이곳은 우리에게 단순히 가성비가 좋은 관광지 그 이상이다. 여전히 제대로 기록된 적이 없는 그래서 청산되지 못한 항일 독립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가족들의 삶을 희생시키면서 저항한 분들의 이름과 발자취가 어제 일처럼 생생한 곳이다.

이런 연해주 항일 운동 역사의 한 가운데에 최재형 선생이 있다. 최재형 선생은 사전에 직업이 ‘독립운동가’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를 알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항일운동의 역사 그 자체를 제대로 듣고 배운 적이 없는 처지에 최재형 선생 같은 분을 안다면 그거야말로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니냐고 동행했던 한 분이 말한다. 정확하고 맞는 말이다. 최재형 선생은 1858년(철종 9년)에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 최홍백과 기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작은 아들로 출생했다. 최홍백은 1869년 함경도 지역에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자 가족을 데리고 연해주의 지신허라는 작은 마을로 이주하였다. 이 지신허에는 이미 1863년 무렵부터 지독한 극빈의 생활을 이겨보려는 마음으로 국경을 넘어 온 조선인 14세대가 정착해 있었고, 뒤를 잇는 사람들이 점점 늘면서 상당한 크기의 한인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최재형은 연해주에 와서도 여전히 먹을 것조차 변변하지 못한 식구 많은 집을 나와서 선원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때 다행히 친절한 러시아인 선장부부를 만나서 큰 도움을 받았다. 선원이 되어서 세계의 여러 곳을 다니는 기회를 얻고 러시아 생활에도 적응한 최재형은 최 표토르 세묘노비치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는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은 없음에도 명석함과 부지런함으로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을 뿐만 아니라 풍부한 지식을 쌓으면서 러시아인과 조선인들 양쪽에서 큰 신뢰와 존중을 받았다. 조선인의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는 능력은 읍장이 되는 발판이 되었고 또한 모스크바에서 열린 황제의 대관식에 초대를 받을 정도로 러시아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사업가로서도 탁월해서 큰 재산을 모아서 당시 러시아에 살고 있던 조선인 가운데 가장 큰 경제력과 정치적인 능력을 가진 한인공동체 지도자가 되었다. 이쯤 되면 모두가 부러워 할 재산과 지위나 자랑하거나 명예를 즐기면서 큰 소리치고 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최재형은 안락하고 편안한 삶 대신에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최재형은 러시아 땅에서 러시아 이름으로 활동한 사업가였지만, 동시에 ‘조선인’이라는 자아의식을 철저하게 가진 사람이었다. 조선인 최재형은 어렵게 벌어서 모은 전 재산을 나라를 되찾는 일에 쏟아 부었다. 조선인 학교를 수 십 개씩 세우고 신문들을 발행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연해주 남부에서 최초의 의병부대를 창설했다. 어디 그 뿐인가.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거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계획했고 안중근 의사의 체포 후에는 러시아 변호사를 구했고,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보살폈다. 이 대목에 이르면 솔직히 크나큰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까지 닥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모든 것을 ‘초개’처럼 내던진 것일까?

최재형의 별명이 ‘페치카’다. 러시아 말로 난로를 뜻한다. 이 별명을 통해서 최재형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암울의 시대에 극빈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살기 위해서 조선인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했다. 어디에서도 최재형에게 필요한 온기를 제공할 난로는 없었다. 하지만 그 가혹한 삶을 이겨 낸 최재형이 한 일은 다른 사람들의 난로가 되는 일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잔인한 삶에 대한 가장 완벽한 승리가 아니었을까. 그의 숭엄한 행적을 보면 난로는 많이 부족한 표현이다. 역사적도 정치도, 삶 자체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서 일어 선 사람들을 위한 어떤 일도 주저하지 않은 최재형을 두고 안중근 의사는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그럼에도 최재형, 이 이름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다.

1920년 4월 5일 새벽 최재형은 일본군에 의해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감행된 학살만행 때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이 학살 사건을 ‘4월 참변’이라고 하며 다른 수많은 독립군도 함께 학살당했으나 무덤조차 남지 않았고 도로 변에 추모비가 있을 뿐이다. 최재형은 아들과 함께 살아남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는 체포되기 하루 전에 피신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늙었고 충분히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되지만 너희들은 살아남아야 한다. 나 혼자 죽는 것이 낫다.” 그는 자신이 살고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면 해방된 나라가 그에게 한 것은 무엇인가?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이 추서되긴 했지만, 1995년에야 건국훈장이 수여되었고 1999년 비로서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사람은 기억과 기록의 공유를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아는 존재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두고 여전히 분열하며 진통을 겪는 중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민하지 않고도 최재형 선생과 같은 분들의 빚 위에서 천연덕스럽게도 종속의 삶을 살고 있다. 그 결과가 지금도 진행 중인 대립과 반목의 굴레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서로를 향한 이 독기를 녹일 최재형 선생의 난로가 절실하고 또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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