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벌대·빨치산 아픔 딛고 정직하게 산처럼 사는 사람들

입력 2022.07.20. 17:16 이석희 기자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구례 광의면서 지리산을 보다
온동에서 내려다본 구례

[마을에서 인간과 삶을 읽다] 구례 광의면서 지리산을 보다

◆골목 곳곳 자연 속 평화로움 느껴져

구례를 가는 길은 지리산을 가는 길이다.

구례에서 남원 방면으로 올라가면 좌우로 두 산줄기 사이로 서시천이 흐른다. 마치 엄청난 배를 제작한 후 출항시킨 모습처럼 움푹 파인 구례는 산도 들도 강물도 하늘도 온통 파랗다.

구만지 철교

산은 사람을 품어주기도 하고, 또 마을 앞뒤로 나눠 차단하기도 한다. 지리산이 그렇다.

지리산에 반쪽 엉덩이와 어깨를 걸친 구례의 아침은 평온하다. 광의면사무소가 있는 연파리 공북마을 하대 상대마을 신지 마을은 마을 앞으로는 서시천이, 마을 중심으로 지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천은천이 흐르는 전형적 배산임수 지형의 마을이다. 그래서인지 골목 곳곳에서 자연 속의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천을 사이로 몇 개의 마을이 자리 잡은 제법 큰 마을로 높은 산, 맑은 물 넓은 토양에서 자연을 닮아가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칡넝쿨처럼 이웃들과 단단하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지난 역사가 그들에게 그렇게 살아가도록 했는지 모른다.

온동 난동 당동 전경

광의면 마을에 행정기관이 모여 있어서인지 농사일을 하던 일꾼들이 점심을 먹으러 면사무소 주변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젊은이들이 제법 있었고, 그냥 논농사 이야기보다 감나무며 하우스 농사 이야기로 분주하다.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는 한 젊은이가 김치찌개를 먹으며 막걸리 한잔을 권한다. 시골도 열심히만 하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곳이란다. 무엇보다 일에 얽매이지 않아 좋고, 공기까지 좋아서 절로 마음까지 넉넉해진단다.

난동리 소나무길

◆꽃과 나무들 사이에 즐거운 아이들

온동리 쪽으로 올라가서 난동리를 거쳐 당동리 쪽으로 돌아오는데, 세 마을이 한 마을 같았다. 양쪽 마을을 두고 난동리가 칼처럼 난동을 낸 것 같기도 하지만 실상 두 마을 이름을 합하면 온난한 동네다.

난동리 위로 올라가니 야생화 테마랜드가 가파른 언덕에 펼쳐져 있다. 지리산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야생화들이 진한 향기를 내뿜으며 무덕무덕 손을 흔든다. 마침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손에 손잡고 꽃을 구경하고 있다. 그 모습이 활짝 핀 꽃보다 아름답다. 이름 그대로 이런 곳에 피고 자란 것만이 진짜 야생화일 것이다.

당동마을

한 굽이만 돌아가니 생태 숲이다. 어젯밤 이곳에서 숙박했는지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산책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꽃과 나무들 속에서 덩달아 즐겁다. 덕굴골, 함죽골, 새실도랑골, 구만제, 지리산 호수공원, 구례 야생화 테마랜드, 생태숲 방문자센터, 할미성 철쭉 동산, 숲속의 수목 가옥, 지리산 정원, 유아 숲 공원 등등 이름만 들어도 각기 나무요 초목이며 하나의 숲이자 하나의 커다란 자연계이다.

광의면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나무나 꽃을 닮아서 서로 잘 뭉치고 잘 웃는지 모른다. 매년 열리는 서울과 광의초에서 실시하는 광의초등학교 체육대회에는 엄청난 졸업생들이 모여 화합을 다진다. 산들이 어깨동무하듯 지리산 둘레길로 이어져서인지 마을은 떨어져 있을지라도 마을 사람들의 정이 각별하다.

온당리 뒷산 길은 지리산 둘레길로 많이 찾는다. 젊은이들은 물론 노익장들도 머리띠를 두르고 걷는 곳이다. 오미에서 온당리까지 지리산 둘레길 중에서 드물게 두 갈래 길이다.

온당리 마을

잘 정비된 예술인 마을 주변으로 감나무들이 지천이다. 온당리에서는 온통 산과 골짜기이고 그곳에 수많은 수목이 푸릇푸릇 생명을 자랑하고 있다. 지리산에서 서시천으로 흘러내리는 분지 형태의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에서 주민들은 감나무와 고추 농사로 무더위 속에서도 바쁘다.


◆여순 사건 관련한 민간인 학살 많아

구례 광의면 여자 정신대원

구례는 온통 산으로 형성된 곳이다. 게다가 광의면은 구례에서 외진 곳이다. 그러니 중앙이나 관으로부터 소외되기 쉬운 곳이어서 어느 곳보다 더 많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근로정신대원 명분으로 어린 소녀들을 선발해 갔다. 교장이 교사들에게 명하고, 명령을 하달받은 교사들이 주로 11~12세의 소녀들을 지명하는 방식으로 선발했는데, 광의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일본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상급학교에도 진학시켜 주겠다는 갖은 회유를 해서 해마다 30여명의 소녀를 끌고 갔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시모노세키 등에서 종군 위안부로 강제로 끌고 간 것이다.

'광의면의 모스크바'로 불린 온당리에서는 한국전쟁 전후로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대부분 여순사건 관련자였다.

이순신 백의종군길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진과 염상구처럼 토벌대와 빨치산 형제의 이야기는 물론 삼촌을 잡기 위해 나선 조카 이야기 등 수많은 슬픈 이야기가 광의면 곳곳에 수도 없이 많다. 이념과 전쟁이 가족과 마을을 좌우로 갈라놓았고, 생(生)과 사(死)의 길로 내몰았다.

1948년 12월, 대한청년단(총재 이승만) 단장 김영준이 단원들과 의용 경찰들을 대동하고 광의면 온당리에 들이닥쳤다. 그리고 온당리 주민 약 20여명을 광의국민학교로 끌고 갔다. 그곳에는 이미 면내 18개 마을에서 끌려온 주민 약 80여 명이 모여 있었다. 그해 10월 여순 항쟁으로 많은 이들이 지리산으로 몸을 피했다. 김영준은 토벌을 피해 지리산으로 입산한 봉기군과 접촉을 차단한다는 명분으로 가족들을 격리·감금했으며 밤이 되면 이들을 불러내 학살을 자행했다. 김영준의 말은 곧 법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경찰이었던 그는 해방 후, 대한청년단장 이름으로 마을 사람들을 불법 감금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그곳이 광의면이었고, 대한청년단의 민간에 의한 수용소가 유일하게 있는 곳이 바로 광의면이었다.

지리산 구례 생태숲

◆차곡차곡 쌓인 삶들 모여 역사가 된다

75년 전의 슬픈 이야기 위로 지리산에 비가 내린다. 산을 내려 온 운무가 골짜기에서 한참을 머물더니 마을을 휘덮고 올라간다. 쓰러져간 영혼이 비가 되고 구름이 되어 마을을 감춰주고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지리산 정원

광의면 마을에서는 온동리 난동리에서는 녹음이 짙다. 어쩌면 저 나무들은 가을이 되면 피보다 더 진한 색깔을 토해 낼 것이다. 어찌 잊었겠는가, 차마 다시 꺼내기조차 힘들어서 계곡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탕탕거리고 윙윙거리며 소리를 낸다.

어리석었든지 영특했든지 아니면 피해자든 가해자든 삶은 봉우리를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그 삶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흘러내려 강이 되고 역사가 된다. 섬진강은 그렇게 역사처럼 흐르고 있다. 흘러간 과거의 암울하고 참담한 주검 위로 마타리 원추리 철쭉 산수유꽃이 피어난다.

이왕 살 바에는 정직하게 누구 원성 사지 않고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보고 배운 게 지리산 광의면 사람들이다. 지리산 마을 온당리 사람들은 아픈 역사를 밟고 살아가기에 더욱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 따뜻함이 영원토록 이어지도록 어느 편을 가르지도 말고 어느 편을 미워하지도 말고, 서로 산처럼 어깨를 걸고 꽃처럼 향기를 내고 나무처럼 뿌리로 이야기하고 그래서 지리산(智異山), 서로 다름과 특이함을 알고 인정하는 삶이 슬기롭다고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산, 밝고 의롭게 살아가라는 광의면(光義面) 지명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박용수 시민전문기자 toamm@hanmail.net

박용수는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전남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줄곧 수필 쓰기만 고집해 왔다. ‘아버지의 배코’로 등단하여, 광주문학상, 화순문학상, 광주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하였다. 광주동신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며, 작품으로 꿈꾸는 와불, 사팔뜨기의 사랑, 나를 사랑할 시간이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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