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2(화)
현재기온 18.2°c대기 매우나쁨풍속 0.9m/s습도 90%
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28> 스테판츠민다를 떠나며

입력 2020.05.21. 17:35 수정 2020.05.21. 17:45 @조덕진 moleung@gmail.com
수천년 바람결에 실려온 프로메테우스 신화
사메바성당 앞 카페

밤 내내 떠돌던 별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카즈베기 산에 새벽안개가 옅게 드리웠다. 어젯밤 꿈에는 고통으로 울부짖던 프로메테우스가 찾아오지 않았다. 여행에 지친 나를 찾아왔다면 잠을 자지 못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새벽녘에 독수리 떼 대신에 작은 새들이 단잠을 깨운다.

아침을 먹으러 호텔 로비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더니 진한 와인 내음이 배어 있었다. 별빛에 잠긴 카즈베기 산을 보며 연인들이 주고받았던 눈빛과 와인 잔을 잡은 떨리는 손길과 그들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아침까지 남아있는 듯했다.

진한 커피를 마시며 눈 덮인 카즈베기 산을 바라본다. 늙은 주름살 같은 고봉의 굴곡 사이에 하얀 눈이 쌓여 있다. 늙은 바위와 마른 풀잎에, 수없이 세월을 씻겼던 바람 속에 신화가 스며있음을 느낀다. 무언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 오래전 안나푸르나의 베이스캠프를 향해가던 중 마차푸차레의 송곳 날 같은 정상을 보았을 때도 이런 감정을 느꼈다. 네팔의 카트만두에서 몇날 며칠을 달려가 만난 티베트의 영산 카일라이스를 순례하면서도 느꼈던 감정이었다.

하얀 사람

커피가 식은 줄도 모르고 상념에 잠겨있었다. 몸을 일으켰다. 호텔의 투숙객들이 산을 오를 채비를 한다. 카즈베기 산을 차를 타고 오르려면 마을 입구 정류소를 지나서 새로 조성된 산 아래 주차장으로 가야 한다. 호텔에서 차를 부르면 1시간 30분 정도 이용하는데 80라리를 요구한다. 조지아의 금액으로는 아주 비싼 가격이다. 호텔에서 마을 주차장까지 가면 산을 운행하는 차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이 벌써 다섯 번째 카즈베기 산을 찾는다. 처음 왔을 때는 산길이 너무 험해 사륜구동이 아니면 통행이 불가능했다. 도로마저 1차선이어서 반대편에서 차가 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길을 잘 정비해 일반차량도 쉽게 산을 오른다.

산 아랫마을을 우회하여 잔설이 얼어붙은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면 스테판츠민다 마을이 점점 낮게 보인다. 높이 올라갈수록 아스라한 길 옆 부러진 자작나무에 설화가 피어 우수수 날린다. 높은 산언덕을 차고 오르니 가파른 산 능선 절벽 위로 조지아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가 보인다. 교회로 가는 능선을 가로지르는 길이 영혼 깊숙이에 침잠해 있던 아름다움을 길어 올린다. 차에서 내려 이 길을 걷고 싶어진다. 바람이 잦아들고 11월의 햇살이 가난한 영혼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게르게티 트리니티 교회는 교회 아래 주차장에서 교회를 바라보며 가파르게 올라가야 한다. 검은색 돌로 담이 둘러쳐져 있어 청초한 하늘빛에 더욱 경건해진다. 교회는 14세기에 지어졌으며 갈색 톤이 성스러움을 자아낸다. 언덕을 힘겹게 올라 종탑이 있는 낮은 문을 허리를 숙이고 지나간다. 종탑 안의 벽은 무언가에 태워진 것 같은 흑빛이다. 또 다른 문을 지나면 교회 본당이 보인다. 검은색 신부복을 입은 조지아 정교회 수사들이 모여 교회 주위를 정비하고 있었다. 조지아 남성들이 건장하듯이 수사들도 눈빛이 맑고 체격이 건장했다.

화병에 꽂힌 해바라기

교회 아래는 깎아내린 듯한 낭떠러지다. 겁이 없는 젊은 여행자들은 돌 위에 걸터앉아 사진을 찍는다. 마을 뒤편으로 4,451m의 샤니 산이 보인다. 교회 안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갈구하는 눈빛으로 촛불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행자들은 자신의 종교와 관계없이 숭고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떠나온 고국의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조지아인들은 국난이 일어나면 국가의 중요한 물품을 이곳에 보관했다고 한다. 교회까지 왕복 3시간 길을 걸어서 올랐다고 하니 이 교회에 대한 조지아인들의 경외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교회에서 바라본 카즈베기 산은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이고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작고 작은 인간들만 떠들고 환호하고 웃고 슬퍼한다. 이들이 올리는 기도가 진정 하늘에 닿을까. 자신들이 만들어낸 쓸모없는 번뇌를 씻어 낼 수 있을까. 교회 안 어둠 속에서 성모상이 그윽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본다. 내가 밝힌 촛불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미세하게 떨린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금방이다. 마을 입구 정류소에서 트빌리시로 가는 차에 올라 출발하니 떠나는 사람들 눈에 남겨진 풍경들이 스치듯 지난다. 구다우리를 지나고 언덕 위 모자이크 벽화가 멀어져 간다. 멀리 하늘에 독수리 떼 대신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인간 새들이 신화 속을 날아다닌다. 강은 끝없이 이어지고 마을들이 하나둘씩 멀어져 간다. 프로메테우스여 안녕.


한희원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srb.co.kr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