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북서부의 스바네티는 코카서스에서 오랫동안 외부와 고립된 마을이다. 개방이 늦은 연유로 마을의 전통이나 풍습, 전통 가옥 등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메스타아는 우쉬바(Ushba 4710m), 텟눌디(Tetnuldi 4858m)등 4000m이상의 고봉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악지역의 웅장함과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닌 조지아의 스위스 마을로 불린다.
메스티아의 작은 호텔에 몸을 푼 우리는 숙소 근처의 공연장을 갖춘 마을 회관에서 메스티아의 전통 공연을 관람했다. 전문적인 배우들이 아닌 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연은 우리의 한과 유사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며 고음과 저음으로 휘감은 노래들은 강원도 정선에서 뗏목을 타고 부르던 사공들의 느린 아리랑을 닮은 듯 했다. 오랫동안 산에 고립되고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가슴 속을 흐르는 삶의 애환과 자기만의 강. 그 강이 노래 속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굽이치는 것 같아 음악을 듣는 내내 가슴에 사무쳤다.
관람객은 여러 나라에서 모인 여행자들이었다. 서로의 전통과 문화는 상이하지만 관람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 담아둔 애환을 투영한 노래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산을 넘고 넘어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신화의 노래를 듣는 우리가 신화의 주인공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언덕에 있는 마을회관에서 바라본 불빛들도 우리와 함께 노래를 듣고 있었다.
다음날 일찍 코울리 호수로 트레킹을 떠났다. 메스티아가 해발 1400m에 위치해 있는 반면 코울리 호수는 해발 2700m 우쉬바 산 아래에 있다. 호수까지는 총 8~9시간이 소요된다. 체력과 시간이 소모되는 트레킹이라 우리는 차량을 이용하여 호수 근처까지 가기로 했다. 해발 2700m까지 오르는 트레킹은 아름다운 마을과 산자락을 구경하며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높은 산과 평평한 언덕 위에 움푹 파인 작은 호수에 푸른 하늘과 구름이 잠겨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호수에 잠겨있는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았다. 호수에 잠긴 하늘은 창공의 하늘빛보다 더 푸르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도 점점 호수가 되었다. 몸속으로 하늘과 구름이 들어와 앉았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호수가 되고 푸른 하늘과 구름이 된다.
높은 산에 숨은 듯 자리 잡은 호수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한가득 담고 있다. 코울리 호수 너머에는 4000m가 넘는 산맥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밤이 되면 별들이 호수로 내려와 몸을 씻고 영혼의 안식을 누릴 것만 같다. 작은 풀꽃들도 움직임 없이 호수를 지키고 있다. 바람이 부니 호수에 물결이 일고 하늘도 구름도 물결을 따라 일정한 형태로 움직인다. 호수가 보여주는 파동은 군인들이 행진을 하듯 바람의 구령에 따라 일렬횡대로 서서 끝없이 움직인다. 오랫동안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여행자도 행진대열에 끼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에도 인생이 있다. 거센 바람이 부는 날 이 높은 호수에 다시 오고 싶다. 언제나 다시 올 수 있으려나. 우리는 서둘러 지프차를 타고 마을 중앙에 있는 세티광장으로 향했다.세티광장 주변에는 인포메이션 센터를 비롯하여 버스정류장, 식당, 카페들이 모여 있어 여행자들이 정보를 나눈다. 세티광장에는 타마르 여왕의 동상과 맛집으로 유명한 Laila 식당이 있다.
메스티아 마을에는 1936년에 개관한 스바네티 박물관이 있는데 2013년에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건축 했다. 이 박물관에는 기원전 3세기부터 출토된 유물과 13세기 조지아의 황금기를 이끈 타마르 여왕의 장신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세티광장에 내려와 주그디디로 가는 마르슈카에 몸을 실었다. 주그디디까지 가는 길은 고봉을 옆에 두고 가는 아름답고 험준한 길이다. 세 시간 정도를 달리면 주그디디 기차역에 도착한다. 우리는 기차역 낡은 식당에 들러 힌칼리(조지아만두)를 먹은 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스바네티를 흐르는 영혼의 강이 트빌리시로 가는 열차와 함께 흐르고 있었다. 열차는 밤기차와 달리 조지아 사람들이 이용하는 것 같았다. 이국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꿈같은 기차여행이었다. 처음 보는 조지아의 들녘과 마을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트빌리시가 벌써 그립다.
-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12. 산악마을 ‘우쉬굴리’를 향하여(하) 존재로서의길과 나뭇잎/ 바람과 초원/ 그와 같다나는 너를 느끼고/ 네가 나를 느끼는/ 자유로움나의 전부를 내 보이고/ 너를 아는 것/ 그 존재로서의 (한희원 작 ‘존재로서의’)슬픈 영혼을 찾는 조지아 민요 술리코를 가슴에 담고 메스티아와 우쉬굴리 그 먼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우쉬굴리는 메스티아를 거쳐야 갈 수 있다. 트빌리시에서 메스티아까지 가는 교통편은 버스와 기차 또는 비행기가 있다. 조지아는 비행기가 대중화된 이동수단이 아니기 때문에 비행기가 운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더 소요되겠지만 낭만적인 여행을 기대한다면 밤 기차 행을 추천한다.트빌리시 중앙역에서 밤 9시쯤에 기차를 타면 2~4명이 탈 수 있는 침대 열차가 있다. 이 열차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새도록 산악지역 작은 마을의 전설을 휘감은 채 몸을 누인다. 우리는 침대칸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우리가 부르는 술리코를 듣고 다른 칸에 있던 여행자들이 우리 곁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박문옥의 노래가 지친 여행자들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9시에 출발한 밤 기차는 아침 6시에 조지아의 서부 도시인 주그디디에 도착했다. 서늘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역에서 조금 걸어가면 메스티아로 가는 마슈르카가 기다리고 있다. 만석이 되어야만 출발하는 낡은 미니버스 마슈르카가 여행자를 싣고 아침을 가르며 메스티아로 향한다. 우리는 더 멀리 있는 우쉬굴리에 먼저 가기로 했다. 슈카라 빙하(5,193m) 지역을 둘러본 후 메스티아를 여행하고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메스티아에서 우쉬굴리로 가는 길은 만년설에서 흘러내리는 계곡을 끼고 가는 험준한 길이었다. 빙하로 가는 대평원 위에서 바람이 들려주는 신화를 들으며 두 시간을 달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유럽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인 우쉬굴리였다. 이곳은 70여 가구에 200여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산과 들녘에는 자유롭게 방목하는 소와 돼지들이 인간과 함께 노닐고 있었다. 우쉬굴리의 정류소에서 여행자들이 만년설에서 시작한 개울 옆에 앉아 지친 몸을 누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숙소는 버스정류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덩치가 큰 주인은 늙은 부모를 모시고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은 두 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트빌리시에서 제법 비싼 돈을 주고 기타를 주문해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게 했다. 두 딸은 박문옥과 화음을 맞춰가며 노래를 불러 주위를 즐겁게 했다. 마을을 산책하다 돌로 지은 이층집에 시네마라는 간판이 걸려있어 들어가 보았다. 우쉬굴리 출신 영화감독 ‘마리암 해치바니’가 연출한 ‘데데’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다. 조지아영화로는 드물게 국제영화에서 상을 받은 영화인데 우쉬굴리의 사계절이 배경으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영화였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 여주인의 친언니가 감독이어서 직접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영화감독을 만난다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감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수더분한 할머니가 계셨다. 화려한 영화계를 뒤로 하고 고향의 깊은 산속 마을에 정착한 마리암 여사의 삶이 오히려 영화 같았다. 그날 밤 동굴 같은 이층 돌집 영화관에 바람이 찾아들어 담요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았다. 한참 영화에 빠져있는데 문이 덜컹 열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늙은 소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영화를 보니 우쉬굴리의 겨울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었다. 눈 숲에 갇힌 우쉬굴리. 영화를 보는 내내 몸은 차가웠으나 마음은 따뜻했다.다음날 설산 슈카라 빙하로 향했다. 걸어서 왕복 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우리는 그날 메스티아로 나와야 해서 지프를 타고 출발했다. 바람과 함께 걸으며 우리는 말이 없었다. 인간의 언어는 어느 순간 영혼을 목마르게 한다. 중간에 지프를 먼저 가게 한 후 가을로 접어든 평원을 걸었다.바람과 풀잎과 개울이 침묵의 평원을 감싸고 있었다. 끝이 없는 아스라한 풀숲 사이를 따라 걸었다. 저 슈카라 빙하를 넘으면 수많은 역사를 함께 한 러시아 땅이다. 러시아의 문호들은 이 높은 산맥을 넘으면 따뜻한 나라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산을 넘었다. 평원이 끊기고 차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나왔다. 여기서 빙하까지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언뜻언뜻 보이는 산길에는 알 수 없는 꽃과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었다. 여행자를 위한 카페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기류에 따라 흔들리는 모습은 신화를 향한 손짓이었다. 산길을 걷는 우리들의 영혼도 개울처럼 맑았다. 한참 산길을 오르니 하얀 고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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