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明 청명2020.04.04(토)
현재기온 10.2°c대기 나쁨풍속 1.9m/s습도 27%
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 편지 13. 신들의 정원에서

입력 2020.02.06. 18:12 @조덕진 mdeung@srb.co.kr
인간의 자격으론 함부로 출입할 수 없음을...
‘강을 걷다’

강에 띄운 편지

고요하다

눈을 감는다

강이 있다

나무 숲 속 사이로

강은 흐르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흐른다

강은 무어라 말 하려는 것 같았다

강변 나무들이 미세하게 떨렸다

강에 손을 담갔다

강이 나의 손을 잡는다

강물은 차가웠는데 손은 따뜻했다

잠깐 물결이 흔들렸다

파문은 강이 흐르다 멈춘

산 아래 기슭에 숨는다

나는 강가에 앉아

강이 보이지 않는

멀고 먼 그곳을 응시했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

강만이 갈 수 있는 그 곳

가슴에 흐르는 눈물이 있으면

이 강 같을까

바삭, 나뭇잎에 적은

강물로 쓴 편지 한 장

띄워 보낸다

(한희원 작 ‘강에 띄운 편지’)

하늘과 맞닿는 높은 산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범접할 수 없는 신의 영역임을 느낀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온 몸으로 받치고 있는 하얀 설산. 아스라이 멀고 먼 곳이지만 푸른 하늘 아래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봉우리로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손 안에 잡힐 듯하다.

오래 전 안나푸르나를 오르다 롯지(숙소)에서 잠이 들었었다. 새벽녘에 침낭에서 벗어나 롯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실핏줄까지 보이는 보름달 사이로 안나푸르나가 보였다. 4000미터에서 올려다 본 산봉우리가 달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거대한 하얀 덩어리와 마주한 순간 무서움이 와락 달려들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몰려든 무서움에 나도 모르게 재빨리 롯지 문을 열고 안으로 피하듯 들어갔다. 신들의 정원을 인간의 자격으로는 함부로 출입할 수 없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슈카라 봉(5193m)은 만년설에 덮인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빙하로 가는 길에는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고 오랜 세월을 견뎌온 나무와 풀잎 위로 맑은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부서짐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눈부심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차가 진입할 수 없는 막다른 곳에서부터 1시간 이상 산길을 걸어야 빙하 아래까지 갈 수 있다. 만년설에서 발원한 우윳빛의 빙수는 흐를수록 진한 에메랄드색 물길이 되어 거친 숨을 뱉으며 좁은 산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우리는 물길을 거슬러 올라 슈카라 빙하로 걸어갔다. 산이 눈앞에서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간간히 가족이나 연인들이 손을 잡고 오르고 있었다.

산을 오르다 물길 옆에 앉아 쉬고 있는데 늑대를 닮은 하얀 개가 우리 옆에 와 앉는다. 영화 ‘나자리노’에 나온듯한 신비스런 눈빛을 한 늑대의 모습이었다. 아, 눈빛이 설산을 닮았구나! 친구 송기전이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개에게 건넸다. 하얀 개는 먹이를 물고 아무런 인사도 없이 형언할 수 없는 눈길을 보내더니 산 어딘가로 사라졌다. 우쉬굴리 슈카라 봉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모든 것에는 산의 영혼이 숨어있다.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드디어 슈카라산 입구에 도달했다. 수천 년 동안 녹지 않고 층층이 쌓인 빙하 사이로 얼음동굴이 보였다. 동굴 속에서 물이 흘렀다. 빙하의 작은 물길이 흐르고 흘러 언젠가 그리운 우리 바닷가 어느 포구에서 다시 조우하기를 소원했다. 손을 담글 수 없을 만큼 찬 물가에 앉아 지친 몸을 쉬고 있다가 혼자 빙하 입구까지 걸어갔다. 순간 머리 위에서 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려 올려다보니 얼음에 덮인 작은 돌멩이들이 수백 미터 위에서 빠른 속도로 굴러와 손목과 배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이 몽롱했다. 몸에 깊은 상처가 났지만 친구들의 여행을 망칠까봐 말을 하지 않고 혼자 아픔을 삭였다. 높은 산은 영혼이 있기에 겸허한 마음으로 오르라는 것을 망각했었다.

슈카라를 뒤로 하고 오후에 메스티아로 향했다. 물길은 강을 이루며 아찔한 협곡 사이로 흐른다. 낡은 버스는 절벽을 낀 험준한 길을 굽이굽이 춤을 추듯 달린다. 메스티아의 작은 호텔에 짐을 풀고 시내 산책을 나섰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과 산 사이에 자리 잡은 집과 망루들, 마을 너머로 보이는 평야와 고봉들, 하늘을 향해 서 있는 사이프러스와 미루나무. 아, 윤회의 저편 기억나지 않는 곳에서 내가 목동이었던가? 그 시절에 걸었던 마을로 들어왔구나!

저녁 무렵이 되면 망루 옆의 집에서 하나둘 불을 밝히면 별들이 우수수 지상으로 떨어진다. 산 중턱에 서 있는 하얀 조지아 정교회의 종소리가 따뜻하게 들려온다. 우연히 들른 숙소 옆에 있는 식당이 맛집으로 유명한 집이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이국에서 모인 여행자들은 와인에 취해갔다. 그날 밤 우리는 스바네티 지역의 민속공연을 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고립된 채 산악지역을 지킨 그들의 민요는 또 어떤 전설을 노래할까? 메스티아의 고즈넉한 밤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했다.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광주・전남지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 교통정보, 미담 등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다양한 사연과 영상·사진 등을 제보받습니다.
메일 mdilbo@srb.co.kr전화 062-606-7700카카오톡 플러스친구 ''무등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