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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

화가의 안식년, 한희원의 트빌리시편지<4> 마르자니쉬빌리의 밤

입력 2019.11.28. 16:51 @조덕진 mdeung@srb.co.kr
수은등 불빛은 아무 이유도 없이 떠돌고

마르자니쉬빌리의 밤

끝없는 기침 속에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퇴락한 건물의 회색빛이 안개에 젖어들고

수은등 불빛이 아무 이유도 없이 떠도는

마르자니쉬빌리의 밤

밤은 깨어있는 것을 잠들게 하고

잠들어 있는 것을 깨어나게 한다

거대한 동물에 긁힌 늙은 나무들이 밤을 지킨다

불이 꺼진 등대들

긴 그림자들 수은등 불빛아래 춤춘다

느리고 빠르게 웃고 울며

이별을 고한 연인들이

이별을 무서워하지 않고 두리번거린다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들은

지칠 줄 모르고 밤을 찾는다

어둠이 막다른 길에 몰렸다

천천히 나를 보고 걸어 나온다

검은 개가 무섭게 다가오다 사라진다

아무도 없는 짙은 저녁

숲에 둘러싸인 깊은 호수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녹색지붕의 러시아정교회를 지난다

길을 걷다 기도드린 교회

늙은 여인이 운영하던 화랑의 철문이 닫혀져 있다

파키스탄에서 온 수염이 범벅인 화가의 아틀리에를 지난다

화가의 방도 닫혀져 있다

오랜만에 바 MY DOM에 왔다

블루의 커튼이 창백하게 드리어진

와인색의 피아노가 지키고 있는 MY DOM

창밖으로 지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불빛에 엉킨다

혼자 바에 앉아 내 그림자를 본다

사람들의 그림자와 겹쳤다 흩어진다.

애달프고 그리운 생들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름다운 종업원 싱긋 웃는다

혼자 앉아있던 바에 연인이 들어온다

숙소에 가면 오래전에 꽂아둔

유리병의 다알리아가 흑빛으로 변해있다, 나를 맞이한다

퇴색한 검은소파와 흑빛 다알리아

죽음과 삶을 옆에 두고 마르자니쉬빌리의 밤은 깊어간다.

밤이 지나면

등대가 깨어나는 마르자니쉬빌리의 아침

그 눈부심

(한희원 작 ‘마르자니쉬빌리의 밤’)

조지아는 비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 비가 내리더라도 잠시 오다 그친다. 조지아는 우산을 파는 곳이 드물다. 트빌리시 시가지의 큰 도로를 벗어나 조금만 안으로 걸어가면 좁은 도로에 오래된 중고차들이 늙은 나무들과 함께 줄지어 서 있다. 걷기 힘든 거리이지만 퇴색한 건물에서 예전에 영화를 맛본 한물 간 배우처럼 관록이 엿보인다. 내가 사는 숙소 옆 마르자니쉬빌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길옆에 아름답고 소박한 MY DOM이라는 바가 있다. 나는가끔 이곳을 찾아 밤늦은 시간까지 혼자 차를 마신다. 숙소로 밤늦게 돌아오는 시간 회색빛 건물이나 붉은 벽돌의 건물들은 창은 낡았지만 아름다웠다.

트빌리시의 건물들은 쇠를 조형하여 만든 대문이나 장식물들이 그리스와 러시아의 문화가 혼합된 듯 독특하고 묘한 미를 보여준다. 트빌리시 뒷거리의 풍경들은 유럽과 동양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을 지니고 있다. 주변국의 수많은 침략을 견디며 얻어진 그들만의 양식인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숙소에서 중앙역으로 가다보면 조지아의 전설적인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가 살았던 집이 있다. 피로스마니가 고향 미르자아니를 떠나 독학으로 그림공부를 하며 닥치는 대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살았던 집이다. 무심코 길을 걷다가 낯익은 피로스마니의 그림이 사방에 걸려있어 이 동네는 예술적인 마을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슬픈 전설의 화가 피로스마니가 살았던 곳이었다.

화구가 떨어져 이삼일 만에 루스타벨리에 있는 화방을 찾는다. 벌써 몇 번째 방문인데 얼굴을 익히 아는데도 웃지도, 쳐다보지도 않는 무뚝뚝함은 여전하다. 자국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이방인에게는 경계심을 보이며 인사조차 없어 갈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하루는 안 되겠다 싶어 휴대폰에 저장된 내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들에 깜짝 놀라며 “뷰티풀”을 연발했다. 다음에 또 갔더니 다시 무뚝뚝하게 대했다. 지금은 마음을 접었다.

화방에 있는 루스타벨리를 지나가면 자유의 광장(리버티 스퀘어)이 나온다. 그곳은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로 올드타운이라 불린다. 자유의 광장은 러시아시대에는 레닌의 동상이 높게 서있었다. 독립 후 지금은 조지아의 영웅 성 게오르기우스 상이 금색으로 도금되어 서 있다. 올드타운에서 일리야 언덕 쪽으로 보면 언덕 꼭대기에 사메바 대성당이 보인다. 사메바 대성당은 조지아 정교회 독립 1500주년과 조지아 독립 공화국 설립 기념으로 199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2004년에 완공했다. 기업인과 시민들이 기금을 조성하여 건립된 대성당으로 트빌리시의 정신적인 신앙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메바성당 아래에는 대통령 궁이, 대통령 궁 아래에는 리케공원이 있다. 리케공원에는 두 개의 실린더 형식의 현대식 건물이 있는데 음악당 Music Hall이다. 한쪽은 전시장이고 다른 곳은 뮤지컬 극장이다. 오래 된 다리 옆에는 메테히 성당이 보이고 리케공원에서 므뜨끄바리강(터키어로 쿠라강)을 건너는 평화의 다리가 있다. 평화의 다리는 투명 유리를 좋아하는 샤카슈빌리 대통령 지시로 2010년에 만들어졌다. 므뜨끄바리강은 터키에서 시작되어 조지아를 지나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카스피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낮에 보면 녹색과 황토색이 섞인 듯한 색을 띠는데 밤에 보면 야경의 황홀함을 배가시키는 매력적인 강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는데 구시가지 쪽에는 아이 러브 트빌리시광장, 나리칼리요새가 있고, 거대한 알루미늄 상으로 제작된 조지아의 어머니로 불리는 카틀리 스데다 기념비가 서 있다. 기념비는 한 손에는 포도를 담는 그릇을, 다른 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걸 보면 풍요와 나라를 지키려는 의지를 상징하는 것 같다.

나리칼리요새 뒤편에는 국립 수목원이 있다. 한 시간 반 정도 숲을 거닐 수 있고 폭포를 볼 수도 있지만 국립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시설과 크기가 빈약하다. 수목원에서 내려가다 보면 이슬람 거리를 지나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보인다. 이슬람 거리를 지나면 바로 유황온천지역을 만난다. 러시아 시인 푸시킨이 애용한 하암온천장이 있다. 푸시킨은 ‘내 생에 트빌리시 유황온천보다 더 황홀한 온천은 가본 적이 없다’며 여기를 예찬했다고 한다. 내가 가끔 다니는 곳은 하나밖에 없는 대중탕이다. 5번이라는 번호가 붙은 온천장인데 5라리(2500원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온천장 안에서 수건은 2라리를 주면 사용할 수 있다. 대중탕이라 관광객보다는 주로 현지인들이 이용한다. 공동탕과 사우나가 있어 저렴한 가격으로 즐겁게 이용할 수 있다. 조지아를 여행하는 친구들과 만나 이곳을 애용하는데 예약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여행에 지친 몸을 풀어주는 아주 매력 있는 곳이다.

아이러브트빌리시 광장에서 골목길로 들어서면 레스토랑과 카페를 만날 수 있다. 묘한 블루와 와인색 소파에 관광객들이 와인에 취하고, 낯선 이국땅의 정취에 취한다. 트빌리시 레스토랑은 피아노를 갖춘 곳이 많아 밤이 되면 작은 공연장으로 변한다. 음식이 너무 짜서 “노 솔트”를 외쳐야 하지만 올드타운은 헛헛한 마음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한희원은

시인을 꿈꾸던 문청출신의 한희원은 조선대 미대를 나와 교사로 활동하다 1997년 ‘내 영혼의 빈터’를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며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50여 차례의 개인전과 국내외 전시에 참여했다. 2015년 양림동에 ‘한희원 미술관’을 개관했다. 화업 45년 만에 화가의 길을 침잠하기 위해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일년 동안 작업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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