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우문우답'] 통한의 제주 4·3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3.04.04. 10:14

4·3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1947년 3·1절 기념식이었다

'3상회의 결정 즉시실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등의

슬로건이 나왔다. 미군정의 방침에

반하는 표어가 등장하자 미군정은

과잉대응 하였고,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시민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당국이 발포에 대해 당연히 사과해야 하나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처벌, 색출이라는

강경책으로 치닫자 시민들의 분노는 커졌다

강경파가 득세하여 앞뒤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에 나선 결과 섬은 생지옥이

됐다. 1954년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당시 제주도민 30만명 중 최소 3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10월 31일 제주도에 가서 4·3사건에

대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어제가 4월 3일, 제주 4·3사건이 일어난 지 75년이 되는 날이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대표와 최고위원들이 대거 4·3추념식에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작년 당선자 신분으로 참석했다는 이유로 불참하고 그 대신 대구에 와서 보수 정치인의 성지, 서문시장을 또 방문하고 프로야구 시구를 했다. 제주 4·3사건은 학교 역사 시간에 가르치지 않아 오랫동안 파묻히고 잊혔던 사건이다. 4·3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은 1947년 3·1절 기념식이었다.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1947년 3·1절 기념식에는 제주 역사상 최대 인파인 3만명의 시민이 모였는데 '3상회의 결정 즉시실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 등의 슬로건이 나왔다. 이는 이승만과 미군정이 추진하는 남한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 통일정부를 구성하자는 정당한 요구였다. 미군정의 방침에 반하는 표어가 등장하자 미군정은 과잉대응 하였고, 평화적으로 시위하는 시민에게 경찰이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당국이 발포에 대해 당연히 사과해야 함에도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처벌, 색출이라는 강경책으로 치닫자 시민들의 분노는 커졌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해외에서 귀환한 동포 6만명의 구직난,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 생필품 부족과 물가고, 친일경찰의 존속, 미군정 관리들의 부패, 이승만의 욕심에 의한 남한 단독정부 추진 등 여러가지 겹친 문제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3·1절 사건에 대한 분노는 3·10 총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학으로 나타났다. 도지사가 항의의 뜻으로 사임했고, 일부 경찰들조차 항의에 동조하였다. 미군정은 이때라도 사과하고 수습했으면 좋았을 텐데 사과 대신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규정하고는 철저한 탄압, 체포에 나섰다. 경찰의 힘만으로 안 되니 악명 높은 테러단체인 서북청년단까지 섬에 투입하여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는 바람에 제주도에 피바람이 불었고, 제주도민들은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앉아서 당하느냐 맞서 싸우느냐의 선택밖에 없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 군사부장 김달삼이 이끄는 500명의 유격대가 11개 지서와 서북청년단를 습격하여 친일경찰과 악질 극우파들을 응징살해했다.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시발이다.

4·3 사건의 진압 책임자 중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려고 한 유일한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유격대장 김달삼과 담판을 벌여 중요한 4·28 합의를 이뤄냈다. 4·28합의의 내용은 72시간의 전투중지, 무장해제와 하산이 이루어지면 주모자들의 신변보장 등 세 가지로서 이것이 사건의 평화적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4월29일 미군정장관 딘 소장이 제주도에 날아와 대책회의를 열었는데 이 회의에서 김익렬 중령은 강경파 조병옥과 대립해 멱살잡이까지 하며 싸운 뒤 해임됐다. 당시 경찰 총수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 상공에서 기름을 붓고 섬을 몽땅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막말을 한 사람이다. 결국은 강경파가 득세하여 앞뒤 가리지 않는 무차별 진압에 나선 결과 섬은 생지옥이 됐다. 1954년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당시 제주도민 30만명 중 최소 3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니 제주도민 중에서 일가친척 중 희생자가 없는 집이 드물 것이다. 1980년 광주도 그랬고 대부분의 민중항쟁이 그렇지만 얼마든지 대화와 순리로 풀 수 있는 것을 강경파들이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다.

유격대장 김달삼은 1948년 8월 하순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 대표자회의에 참석차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는 1949년 8월 게릴라대원 300명을 이끌고 남하하여 경북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다가 1950년 9월 강원도에서 국군에게 사살됐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는 남제주군 대정면 출생이지만 대구와도 인연이 깊다.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해서 살았고, 대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해방 후에도 대구에 사는 형 집에 기거하면서 1946년 대구 10월 항쟁에 가담했다.

나는 학생 시절에 4·3 사건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내가 배운 역사 교과서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20대 후반에 미국인 존 메릴이 쓴 '제주도의 반란'이라는 논문을 읽고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됐다. 요즘은 좋은 책이 많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 현대사는 불모지였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사는 삼국시대, 고려사에서 끝나거나 잘 하면 임진왜란, 동인, 서인 하다가 끝나기 일쑤였다. 물론 고대사, 중세사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사다. 그런데도 왜 현대사를 이렇게 소홀히 취급하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현대사 공백은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치부를 감추려고 일부러 안 가르쳐 생긴 게 아닐까 의심이 든다. 그러다 보니 대학을 나오고 다른 면에서는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도 한국 현대사를 몰라 때로는 무지몽매하고 판단력이 이상한 경우를 더러 본다.

2003년 내가 참여정부에서 일할 때 청와대 수석회의에 제주 4·3 사건이 안건으로 올라왔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이 4·3이 뭔지 잘 몰랐다. 나는 책 읽은 게 기억나 대통령이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할 것을 강력 건의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해 10월 31일 제주도에 가서 4·3사건에 대해 역사상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사실 나는 노대통령이 다음 해 4·3 추모제에서 사과할 것으로 예상하고 그때는 만사를 제쳐놓고 대통령을 수행해서 제주도에 가야지 하는 마음속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예상을 깨고 반년 앞서 사과가 나온 것이다. 그날 저녁 뉴스를 보니 노대통령이 사과를 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방송국 기자가 행사 참석자에게 마이크를 갖다 대며 소감을 묻자 어느 아주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생전에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순간 내 마음이 찡해오면서 대통령이 사과하기를 정말 잘했구나 싶었다. 그날이 내가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일한 2년 반 기간 중 가장 기쁘고 보람 있는 날이었다. 국가폭력에 희생된 제주 3만의 억울한 영령의 명복을 빌고, 길고도 긴 통한의 세월을 살아온 유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경북대 명예교수 전 청와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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