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우문우답'] 역사적 판결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3.03.07. 11:07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 학살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 상징적 사진은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고,

독일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민족으로 평가된다. 반면 일본은 아직도

죽으라고 사과하지 않는 뻔뻔한 민족으로

남아 있다. 이번 탄 아주머니 재판에 주위의

압박을 무릅쓰고 양심적 증언을 해준

소수 베트남 참전군인들의 용기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박진수 판사의 판결은

한국인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그리고 한국인은 도무지 사과할 줄

모르는 일본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격을 드높인,

역사에 남을 명판결이다

한 달 전 서울중앙지법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대한민국이 베트남의 응우옌티탄(이하 탄 아주머니)에게 3천만100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했다.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최초로 인정한 역사적 판결이다.

탄 아주머니는 올해 63세로서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 꽝남성 퐁니 마을 학살 사건이 일어났을 때 8살의 소녀였다. 그날 아침 일찍 엄마는 장사하러 시장에 갔고, 이모가 두 집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갑자기 한국 군인들이 평화로운 마을에 들이닥쳐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모와 아이들은 급히 집 마당에 있는 지하방공호에 숨었지만 한국군에게 발각됐고, 모두 땅으로 올라왔을 때 군인들이 총을 난사했다. 탄의 이모와 언니, 동생, 사촌동생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 탄 역시 복부에 총을 맞아 창자가 쏟아져나왔고, 오빠는 총격에 엉덩이가 날아갔다. 엄마는 그 전에 이미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남매는 다행히 미군이 발견하여 미군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했다. 그래도 워낙 중상이라 10개월이나 입원 치료를 받은 뒤 퇴원했다. 퇴원 뒤에도 부모 없이 학교도 못 다닌 그야말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 힘든 일생을 살았다. 한국 사람이라면 무서워 무조건 피했다. 그러다가 몇십년이 흐른 뒤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최초로 폭로한 구수정 박사를 만나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아 진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구수정 박사는 유학차 베트남에 갔다가 우연한 기회에 과거 한국군의 양민 학살 자료를 접하고 충격을 받아 그것을 1999년 주간지 '한겨레21'에 연속으로 폭로했던 학자다. 나는 그때 그 연속기사를 읽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구수정 박사는 용기있게 진실을 말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빨갱이라는 공격에 시달렸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다. 어느 날인가는 베트남에서 귀국했더니 참전군인들이 구박사 부모님 집에 빨갱이라고 붉은 페인트칠을 하고 가스통을 갖고 와 집을 폭파한다고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여자의 몸으로 협박에 굴하지 않은 구박사의 용기는 오직 정의와 진실을 지킨다는 양심의 발로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구박사는 그 뒤 한베평화재단을 창설해 두 나라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일을 하고 있다.

한국군에 희생된 베트남 민간인이 1만명을 넘는다고 한다. 한국군 증오비, 희생자 위령비가 서있는 마을이 600곳이나 된다. 나는 2014년 여름 구수정 박사의 안내로 양민 학살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마을을 몇 군데 가보았다. 비석에 새겨진 희생자 이름을 보니 모두 노인, 여성, 아이들뿐이었다. 그때 같이 간 일행 중에는 대구 사람들이 많았는데, 치과의사 송필경, 경북대 유진춘 교수, 신평 교수도 있었다. 퐁니 마을을 찾아 탄 아주머니 집을 방문했다. 좁은 2층 다락방을 한국인 방문객들이 빽빽이 메운 가운데 탄 아주머니가 학살 사건을 생생히 증언했고 구수정 박사가 통역을 했다. 기막힌 이야기에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대성통곡하면서 저절로 이렇게 외쳤다. "아주머니 우리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음 해 2015년 4월 탄 아주머니 일행이 한국을 처음 방문해서 양민 학살을 증언했다. 서울, 부산, 대구에서 강연회를 가졌는데, 가는 곳마다 월남전 참전군인들이 대규모 반대시위를 하며 방해했다. 대구 행사는 경북대에서 제일 큰 강의실에서 있었는데, 행사를 승인해준 대학 당국에 외부에서 더러 항의전화가 왔다고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이든 참전군인들이 대거 군복 차림으로 나타나 강연장 건물 앞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건물에 바로 입장하다가는 불상사가 발생할 것 같아서 나는 베트남 사람들을 안내해서 옆 건물로 가서 구름다리를 건너 강의실로 들어가는 작전을 폈다. 그 강의실은 내가 주로 강의하는 장소라서 지리를 잘 아는 이점을 이용했다. 탄 아주머니가 비극의 날을 300명 앞에서 울면서 이야기하자 좌중의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특히 탄 아주머니가 "나는 한국에 오면 한국 군인들이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어요."라며 펑펑 울 때 강연장은 거의 울음바다가 됐다. 이용수 할머니도 참석해서 탄 아주머니를 꼭 안아주며 위로했다.

그날 클라이맥스는 강연 뒤에 왔다. 청중석에는 젊은 시절 월남전에 참전했던 명진 스님이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사회자가 명진 스님에게 소감 한 마디를 요청했다. 잠시 침묵하던 명진 스님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가더니 베트남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합장하며 사과했다. 탄 아주머니가 황급히 의자에서 일어나 스님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폴란드 학살추모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과했던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떠올랐다. 브란트의 사과 장면을 보고 사람들이 말했다. "사과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사과했다" 왜냐하면 젊은 날의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 좌파로서 히틀러에 반대해서 싸웠던 민주투사 출신이므로. 어쨌든 브란트가 무릎 꿇고 사과한 상징적 사진은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졌고, 독일은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는 민족으로 평가된다. 반면 일본은 아직도 죽으라고 사과하지 않는 뻔뻔한 민족으로 남아 있다. 무릎 꿇고 사과한 명진 스님은 말 한 마디 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양심이 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번 탄 아주머니 재판에 주위의 압박을 무릅쓰고 양심적 증언을 해준 소수 참전군인들의 용기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 박진수 판사의 판결은 한국인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그리고 한국인은 도무지 사과할 줄 모르는 일본인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국격을 드높인, 역사에 남을 명판결이다. 탄 아주머니는 판결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손해배상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한국 정부의 인정과 사과를 받고 싶을 뿐입니다. 학살당한 영혼들이 이제 안식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무나 기쁩니다.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부디 탄 아주머니의 여생이 내내 행복하기를 빈다. 경북대 명예교수, 참여정부 대통령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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