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우문우답'] 트로이카의 추억

@이정우 경북대 명예교수 입력 2023.02.07. 10:11

1960-70년대 한국 영화를 주름잡았던

인기 여배우 트로이카 남정임, 문희, 윤정희.

윤정희는 결혼해 프랑스에 살다 잠시 귀국했을때

어느 TV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프랑스와 한국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차이를

묻는 질문에 첫째, 매우 검소하다. 둘째, 여자들이

화장을 별로 하지 않는다. 셋째,아이를 아주

엄하게 키운다고 대답해 깜짝 놀랐고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대단한 통찰력이라고 생각했다

남정임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또 한 명의

트로이카 문희를 나는 우연히 20년 전

두 차례 만났다. 나는 트로이카 중

두 명을 만났으니 이만하면 행운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배우 윤정희가 프랑스에서 타계했다는 뉴스가 떴다.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고 있고, 가족도 잘 못 알아본다는 안타까운 보도를 몇 년 전 들었지만 아! 한 시대가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정희는 1960-70년대 한국 영화를 주름잡았던 인기 여배우 트로이카 남정임, 문희, 윤정희의 1인으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 한국 영화는 엄청난 다작 시대라 유명 배우들은 한꺼번에 여러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기 배우들은 평생 백 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는 게 보통이었다. 배우 윤정희도 그랬을 것이다. 헐리우드의 1류 배우들이 평생 찍는 영화가 소수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과도한 소모전이었다.

나는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갔다가 뜻밖에도 윤정희, 백건우 부부, 그리고 영화배우 신성일, 이순재 등과 만나 인사하는 행운을 얻었다. 말로만 듣던 유명인사들을 한꺼번에 만났으니 완전 대박이었다. 영화 '시'에서 윤정희는 시를 배우는 치매 초기의 할머니 양미자로 나온다. 이창동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 이름은 반드시 '미자' 라야 한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 말이 좀 이해가 안 됐다. 미자라면 어떻고 경자라면 어떤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배우 윤정희의 본명이 손미자라고 하니 우연치고는 참 희한한 우연이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배우 윤정희가 그 무렵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것도 우연의 일치다. 이창동 감독은 이번에 배우 윤정희의 조문을 하기 위해 프랑스까지 갔다고 하는데,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다.

영화 '시'에서 주인공 양미자는 좋은 시를 써보려고 노력하는데도 잘 되지를 않아 괴로워한다. 시를 가르치는 강사에게 어떻게 하면 시상이 떠오르는지 질문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도무지 시가 써지지를 않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양미자는 드디어 영화 말미에 '아그네스의 노래'라는 절창을 남긴다. 나는 이창동 감독이 원래 유명한 소설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런 주옥같은 시를 쓸 수 있는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영화의 끝은 너무나 애절해서 영화가 끝나고도 나는 정신이 멍해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하겠다.

한때 잘 나가던 배우 윤정희는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결혼해서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리고는 자연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다가 어느 해 잠시 귀국했을 때 어느 TV 방송의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나는 우연히 그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내용이 하도 교훈적이어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담자가 윤정희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여러 해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데 프랑스와 한국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차이가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그러자 왕년의 배우는 이렇게 대답하는 게 아닌가. "세 가지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국 사람들에 비해 프랑스 사람들은 매우 검소합니다. 둘째, 한국 여자들에 비해 프랑스 여자들은 화장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셋째, 한국 사람들에 비해 프랑스 사람들은 아이를 키울 때 아주 엄하게 키웁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고,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대단한 통찰력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는 우리가 익히 아는 샤넬, 루이비통, 입셍로랑 등 최고 사치품 생산의 본산인데 프랑스 사람들이 검소하다니, 이게 말이 되나. 실제로 윤정희는 화려한 여배우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프랑스에서 살 때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러 갔고, 매우 검소하고 알뜰하게 살았다고 한다. 내가 미국 유학 시절 겪어본 미국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생각해보니 윤정희의 세 가지 말이 상당히 수긍이 갔다. 미국 사람들도 그랬다. 매우 알뜰하고 검소했다. 미국에서 본 여대생들은 학교에 올 때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옷도 아주 소박하게 입고 다니는 걸 보고 한국과는 다르구나 하고 느낄 때가 많았다.

아이들을 엄격하게 키우기 때문에 식당 같은 데 가서도 미국 아이들은 자기 자리에 어른스레 조용히 앉아 있지, 큰 소리를 지른다든가 우르르 쫓아다니는 애를 볼 수 없다. 그랬다가는 부모한테 혼이 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애들 기죽이면 안 된다는 이상한 철학으로 아이를 방치해 키우는 집이 꽤 많다. 그렇다 보니 애들이 버릇이 없고 제멋대로인 경우를 더러 본다. 그 대신 아이들이 다 크고 난 뒤 우리의 부모들은 대학 진학이나 결혼, 취직 같은 인생의 중대사를 자식 판단에 맡기지 않고 이래라 저래라 시시콜콜 간섭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가족간 갈등이 빈발한다. 서양에서는 반대다. 어릴 때는 규율이 엄격한데, 일단 성인이 되면 부모는 일절 간섭하지 않고 자식의 판단에 맡긴다. 어느 쪽 양육방법이 옳은가? 이 문제에서는 서양식이 옳다고 본다. 나는 왕년의 배우 윤정희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트로이카 중 배우 남정임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또 한 명의 트로이카 문희를 나는 우연히 20년 전 두 차례 만났다. 내가 서울의 무슨 모임에 강연을 하러 갔더니 청중 중에 문희가 있어 인사를 했다. 강연 주최측에서 소개하기를 이 사람이 왕년의 명배우 문희라고 하는 순간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아니 문희라면 할머니가 됐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젊습니까"였다. 트로이카가 활약하던 60-70년대로부터 30년 넘는 세월이 흘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왕년의 인기배우 문희는 할머니와 거리가 먼, 전성기 때의 청순하고 우아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어 깜짝 놀랐다. 젊음을 유지하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는 듯했다. 얼마 뒤 배우 문희를 다른 행사장에서 다시 마주쳐 잠깐 인사했는데, 역시 단아하고 예의 바르다는 좋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트로이카 중 두 명을 만났으니 이만하면 행운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배우 윤정희의 명복을 빈다. 경북대 명예교수, 참여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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