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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분석 통해서 본 김대중 리더십
입력 : 2019년 12월 09일(월) 11:42


‘인동초’ ‘준비된 대통령’ ‘세계적인 지도자’
1997년 12월 18일 치러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승리하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이 기뻐하고 있다. 무등일보DB
삶 자체가 한국 현대정치사다. 평생 열세 번의 선거. 절반이 조금 넘는 일곱 번의 당선. 국회의원(민의원 포함) 선거에 아홉 번 나와서 여섯 번(5·6·7·8·13·14대). 대통령 선거엔 네 번 출마한 끝에 97년 12월 대권을 거머쥐었다. 순탄치 않은 역정. 엷은 잎 몇 개로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운다는 인동초(忍冬草)에 비유되는 이유다.

김대중. 해방 후 등장한 군사정권에 저항해온 민주화세력의 중심축. 불운의 연속. 그의 선거 첫 출마는 54년 3대 총선. 고향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사흘 만에 5·16 쿠데타가 벌어지는 바람에 의사당에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접어든 것은 63년. 목포에서 당선(6대 총선)되면서부터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 80년대는 ‘민주화’ vs ‘산업화’ 세력의 대결.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은 87년 6·10 항쟁으로 이어졌다.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자 탈당한 뒤 평민당 창당. 그해 12월 ‘1노(노태우)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겨룬 대선에서 3위에 그쳤다. ‘3당합당에 맞선 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14대 대선. 숙명의 라이벌인 YS에게 참패하면서 세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난다. 도전과 응전. 숱한 시련에 부닥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인간승리의 신화를 일궜다. “정치를 빼면 나의 인생은 거의 제로가 된다”는 DJ. 반평생 그가 뿌려놓은 흔적과 자취들은 한국 정치의 현재 속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서거 10주기. DJ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시대별·지역별, 국내·외 모두 다르다. “‘실패한 대통령’으로 불려야만 하는 게 슬픈 현실(국내 언론)”부터 “경제·정치·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외신)” “비전 있고 시대를 앞서 생각하는 선구자(독일 학자)”까지 다양하다. 그의 리더십 평가는 진행형이다. 서거 이후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평생을 정치와 함께 해 온 그의 리더십에 대해 알아봤다.

■ 1991년 1월 1일 ∼ 1997년 12월 18일(대통령 당선 일)

90년대는 ‘3김정치’와 ‘탈지역주의’가 주요 선거 이슈. 정치인 김대중은 상수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인 ‘빅카인즈’를 활용해 ‘DJ의 리더십’을 분석했다. 14·15대 대선 기간인 1991년부터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관련 보도는 모두 552건. 15대 대선 관련이 310여 건으로 56%를 차지했다. 정치인생 마지막이자 네 번째의 대권 도전에 나선 DJ. ‘대선 필패론’ ‘색깔론’ 등 반DJ 정서에 시달리면서도 이른바 ‘DJT(김대중·김종필·박태준)연합’을 성공시킴으로써 필생의 꿈인 대통령에 당선된다. 대권 도전 27년 만이다.

역경과 환희의 교차. 평생의 라이벌인 YS와와 맞붙었던 14대 대선에서 패한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영국으로 간 지 6개월 만의 귀국. 95년 새정치국민회의를 전격 창당해 정치에 복귀했다. “국민과의 약속 번복”이란 비난은 이후 15대 총선과 대선 가도에서 망령처럼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1991년 1월 1일 ∼ 1997년 12월 18일(대통령 당선 일) 김대중 리더십 관계도 분석 빅데이터.
당시 대선의 주요 이슈는 크게 두 가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과 처음 도입된 TV토론 대응. 경제에 대한 식견과 함께 정치인의 리더십 관련, 브랜드와 이미지가 중요했다. DJ는 ‘경제대통령’ ‘40년 간 준비된 대통령’ 이미지를 주로 부각했다. ‘DJ가 대선 후보였던 국민회의는 ‘안정세력론’과 ‘준비된 지도자론’으로 지지층을 계속 확대 시켜 나간다는 계획’ ‘김대중 총재의 국정운영 자질과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 개발된 ‘준비된 대통령’ 또는 ‘준비된 지도자’가 대표작’이란 보도 등이다. 매일경제는 경제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통해 “대통령선거에서 이뤄져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정권교체’가 1위로 나왔다”고 보도했다.

‘광개토왕론’도 나왔다. 당내 후보 경선 과정에서다. 세계일보는 DJ가 야당의 대선 후보가 된데 대해 “주류의 ‘DJP단일화를 통한 정권교체론’이 비주류의 ‘국민경선제’ ‘제3후보론’을 젖히고 대의원들을 설득하는데 주효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국제적 역량을 갖춘 지도자’ 등 이미지를 위해 내세운 ‘광개토대왕론’을 구체화시키면서 여권후보들과의 차별화를 시도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대권 4수에 나선 김대중 총재는 최근 ‘광개토왕론’을 제창하고 있다. 영토확장의 대명사로 불리는 광개토왕을 인용, 21세기에는 경제·문화·외교의 세계적 확장이 필요하다는 줄거리다. 따라서 자신과 같이 ‘지식과 경륜’을 겸비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문화일보).

성실·노력형 인사를 선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용인술과 관련해서다. 한국일보는 DJ에 대해 “어떤 사람을 기용할 때 그 사람의 장·단점을 정확하게 파악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돋보이는 대목이다. 김 총재는 일반적으로 성실·노력형을 선호한다. 그리고 측근이라고 해서 무리하게 중용하지 않는 특징도 보이고 있다. 과거 동교동 비서출신들 중 현재 핵심당직을 맡고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 당 10역 인선에서도 가신그룹은 배제됐다”고 밝혔다.

권력구조에 대한 비판적 전망도 다뤘다. ‘DJT’ 연대. ‘나눠먹기’ 지적이 그 것. DJP 연합에 대해 “민주화세력과 근대화세력의 결합”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던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DJT 연합에 대해 “국가적 위기를 구할 통일·안보·경제 주역들의 ‘황금 트로이카’ 체제”라고 주장하며 본격적인 홍보에 나섰다(한겨레신문). 김대중 후보의 DJT연합에는 보혁간·지역간 갈등구조, 구여·야권의 공존 등 집권후 정당내부의 권력투쟁, 집권세력과 의회의 끝없는 정쟁이 일어날 가능성 등이 내재해 있다(경향신문).

이 시기 DJ가 내놓은 미래 정치적 리더십 평가가 눈길을 끈다. 그는 대선 한해 전,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21세기는 지식혁명의 시대다. 정보 통신 과학 기술의 변화로 세계가 격변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대통령은 이런 변화를 내다보는 혜안과 철학, 그것을 실천할 정책과 전략적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대통령론이나 정치철학’에 대해선 “이제 이념대결의 시대는 끝났다. 보수냐 진보냐는 논쟁보다 양자를 포용해서 새로운 길을 가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동해안 무장공비사건 때 초당적으로 대응한 것이나 한총련사태때 단호하게 대처한 것도 이러한 시대흐름에 따른 변화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반면 92년 14대 대선의 주요 이슈는 평화적 정권교체와 대화합. 87년 대선과 88년 총선을 치르면서 대한민국은 갈기갈기 찢겼다. 지역감정과 색깔론이 극에 달하면서다. DJ는 출마의 변으로 “집권하면 대화합과 변화의 새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한국일보).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이 만든 조작· 왜곡된 이미지 등을 해소하는데도 주력했다.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미지 개선을 위한 ‘뉴 DJ플랜’이 어느 정도 성과를 얻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대화합의 정치를 펴고 있다. 특히 그동안 소원했거나 오해를 하고 있던 세력·반대그룹 등과도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경제를 번영시키며 민주통일을 위해 함께 협력해 나가고 있다”며 “아직도 일부에 뿌리깊은 반감이 남아있고 앞으로 개선돼야 할 이미지는 사실 과거 정권 등의 모략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반박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92년 14대 대선 때도 등장한다. 그 해 6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서생적 문제의식을 갖는 순수성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는 실질적인 자세가 조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신문은 “변화무쌍한 정치판에서 지나치게 논리를 추구하는 그의 정치형태는 때로는 이를 ‘이중성’으로 보는 비난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사실 김 대표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바꾸려고 할 때 자기 자신부터를 설득시키려 한다는 게 주변의 한결같은 얘기이다. 이 때문에 정치적 입장변화가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더러 있고 때로는 명료하지 못하다는 지적까지 받곤 한다”고 지적했다.

1991년 1월 1일 ∼ 1997년 12월 18일(대통령 당선 일) 김대중 리더십 연관어 분석 빅데이터
■ 1997년 12월 19일(대통령 당선 및 재임) ~ 현재까지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리더십’ 관련 보도는 모두 1만201건. 이 가운데 국민의 정부 임기(2003년 2월 24일까지) 동안 보도는 4분의 1가량인 2천302건.

1997년 12월 19일(대통령 당선 및 재임) ~ 현재까지 김대중 리더십 관계도 분석 빅데이터.
우선, 국민의 정부에 대한 평가를 살펴봤다. 매일경제는 DJ에 대한 국내·외 상반된 평가를 전했다. “DJ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과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그에 대한 지지도는 바닥을 기고 있고, 야당은 그를 ‘부정부패의 원조’라며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찍었다”고 평가했다. 반면 “일본의 저명한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는 ‘세계에서 단임 5년에 김대중 씨 만큼 변화시킨 대통령은 거의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적 경제전문 통신인 블룸버그는 ‘김 대통령은 경제·정치·외교 분야에서 이룬 업적으로 반세기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국내·외 상반된 평가에 대해 “국민들의 뿌리 깊은 지역감정, 야당의 정략적 공격, 언론의 특성상 정부에 대한 비판 위주 보도,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적 정권들이 만든 김 대통령에 대한 조작, 왜곡된 이미지 등으로 인한 편견이 국내 평가에 개입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역별 온도차도 존재했다. 광주방송(KBC)의 여론조사 결과가 대표적이다. 조사결과, 광주·전남 지역민 39.8%는 ‘DJ정부가 잘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서울·대구 지역민은 39.4%가 ‘못했다’고 평가했다고 전했다. 부산일보는 칼럼을 통해 “DJ는 환란 극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때 DJ의 지도력은 ‘A’ 평가를 받았다. <중략> . 그러나 환란 극복의 칭송 이면에는 천문학적 공적자금 및 외채, 실패한 빅딜, 권력형 비리 등 많은 실정(失政)이 얼룩져 있고, 최대 치적 중의 하나라는 ‘햇볕정책’ 역시 북한 핵문제로 빛이 바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불려야만 하는 게 슬픈 현실이다”고 지적했다.

1997년 12월 19일(대통령 당선 및 재임) ~ 현재까지 김대중 리더십 연관어 분석 빅데이터
용인술에 대한 비난도 잇따랐다. 한국일보는“김대중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이 폐쇄적이란 평을 듣는 까닭은 인선의 기준이 자신과의 인연을 강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사 후엔 으레 ‘그 얼굴이 그 얼굴’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인색한 평을 자초하게 된다. 또 빼놓을 수 없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소수파나 변두리 선호’현상이다. 좋은 환경에서 제대로 교육 받은 사람보다는 역경을 딛고 선 자수성가형을 택한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은 “한때 2백만섬에 이르던 봉토가 15만섬으로 영락한 요네자와 번을 일으켜 세운 우에스기의 리더십을 제대로 본받아야 할 사람은 사실 YS보다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 . 더욱 중요한 요인의 하나는 측근과 개혁주체세력의 철두철미한 관리이다. YS와 DJ가 모두 실패한 대목이자 노무현 당선자가 끝까지 명심해야 할 부분인 셈이다”고 밝혔다.

리더십 평가는 또다시 바뀐다. 서거 이후부터다. 관련 기사는 685건. 특히 서거 10주기를 맞아 본격 재조명되고 있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와 관련해서다. 서울신문은 “한일이 갈등을 벌일 때마다 서거 10주기를 맞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외교력이 새삼 부각된다. 미중 패권전쟁과 한일 갈등으로 한반도 주변 정세가 요동치는 요즘 그가 보여 준 탁월한 외교적 식견과 리더십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DJ가 1998년 10월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실리 외교가 바탕이 된 성과물이다. 당시 오부치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사죄’를 언급했고, 김 전 대통령은 ‘미래 지향적 관계 발전을 위해 노력하자’고 화답했다”고 주장했다.

세계적 지도자란 평가도 나왔다.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학술행사’에서다. 베르너 페니히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명예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종종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연방 총리와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과 비교된다”며 “이 세 정치인들은 모두 현실적인 선지자 또는 선견지명이 있는 현실주의자였다. 이들은 모두 놀라운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으며 ‘성인’은 아니었지만 영웅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현재 중국이 고대 실크로드를 부활하기 위해 ‘일대일로 전략’을 쓰고 있는데 김 전 대통령이 이미 ‘철의 실크로드’ ‘사이버 실크로드’를 제안했었다”고 전했다(한국일보).

서거 10주기를 맞아 발간된 총 30권 분량의 『김대중 전집』은 리더십 재평가의 출발점이다. 중앙일보는 박명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장 인터뷰를 DJ 리더십을 조명했다. 우선, 용인술과 관련해 “DJ는 동원 가능한 최대의 인재를 쓰려 했다”고 소개했다. 박 관장은 DJ의 유산에 대해 “민주화 세력을 대거 국정 운영에 참여시킴으로써 전문관료+산업화세력+민주화세력이 균형을 이룬 국정 운영을 해나갔다. 이 때문에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한·일 관계도 잘될 수 있었다. 북한 참여세력을 제외하고 조봉암 등 거의 모든 세력을 등용한 이승만 정부 초기 이후 가장 넓은 인재 등용이 이뤄졌다”고 소개했다. 이어 “DJ는 JP(김종필 전 총리) 산업화 세력과 연합정부를 만들었다. 안보·국제·평화 문제는 진영이 없다는 걸 인정한 거다. DJ는 이승만 때의 한·미관계, 박정희 때 한·일 관계, 노태우 때 한·중 관계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1동맹 3우호’ 체제를 이어갔다. 강인덕(통일)·박정수(외교) 장관·이종찬(국정원장)·이홍구(주미대사)·이수성(평통 수석부의장)씨 등 외교·안보 쪽은 전원 보수 인사를 썼다. 그때가 한국 외교의 절정기였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65년 협정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유지호기자 hwaone@sr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