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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전남광주, 그리고 상생에 대하여
입력 : 2019년 10월 15일(화) 09:43


이종주 전남농업박물관장
#가수 최백호는 지금 쯤 한적한 시골 읍내 다방에 앉아 뜨거운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을지 모른다. 본디 그에게는 도라지 위스키가 더 어울렸지만, ‘위스키면 어떻고 커피면 또 어쩌랴’ 하 흘러버린 세월이 그를 합일(合一)의 위치까지 이르게 했으리라. ‘위스키가 커피고 커피가 곧 위스키인 것을.’

어쩌면 그는 깃을 반 쯤 세운 진회색이나 잿빛의 긴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앉아 있으리라. 가끔씩 헝클어진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기도 하다가 때로는 나이 그득해 보이는 마담의 실없는 농담에 쓸쓸한 미소로 화답하기도 하면서.

그러다 그는 문득 가슴 저 밑의 고요한 함성을 탁자 위에 꺼내놓을 지도 모른다. 가버린 청춘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야 슬픈 뱃고동 소리처럼 애잔하겠지만, 그래도 미련일랑 남기지 말자는 다짐, 그 서글픈 아우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할 것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운 완도나 고흥 혹은 신안, 전남의 어느 섬 가장자리에 한 사내가 서 있다. 사나운 해풍이 가지런히 빗어 넘긴 그의 머리칼을 향방 없이 흩날리고 간혹 버티어 선 두 다리를 사정없이 휘감기도 하지만, 그는 노란 점퍼의 끈을 단단히 동여매고 먼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다.

바람이 수군거리는 소리, 파도가 두런대는 소리, 그의 곁에는 섬 아낙들과 섬 사내들 몇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아낙들이 손짓하고 사내들이 발을 구를 때마다 때론 구수하고 또 때론 억센 사투리들이 다투어 튀어나와 그와 어깨동무를 한다. ‘함께 가자 우리’ 구름도 잠시 내려앉는다.

바닷바람이 거세고 차가울수록 이상하여라, 그의 가슴은 더워지고 반 쯤 쥔 주먹에 불끈 확신이 차오른다. 그렇다. 바다다. 섬이다. 푸른 하늘이다. 바람이다. 청정의 자원과 역사다. 천년의 전남 천년의 광주를 생각한다. 본디 하나였고 앞으로도 하나일 수밖에 없는 청색의 미래를 이룰 수 있는 꿈, 상생이란 무엇인가?

#상생, 그리 어렵지 않은 두 글자의 속내는 그러나 몹시 깊고 매우 넓다. 노자의 도덕경까지 거슬러 오르면 유무상생(有無相生)이란 구절과 만난다. 유와 무, 있음과 없음이 서로 함께 산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대통합이고 대화합이다.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져 다투기 일쑤인 우리 현실에선 더욱 놀라운 일이다.

음양오행설에 빗대어 보면 금(金)은 수(水), 수는 목(木), 목은 화(火), 화는 토(土), 토는 금과 상생 관계를 이룬다. 또 상생을 모자(母子) 관계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나를 낳아 준 어머니(생아자·生我者)와 내가 낳은 아들(아생자·我生者)의 관계가 상생관계라는 설명이다.

둘 이상이 서로 북돋우며 함께 잘 살아간다는 의미의 상생은 비슷한 개념의 공존이나 공생 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포괄적이다. 수많은 동양 사상가는 물론 다수의 미래학자들이 여기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기도 한다. 상생의 원리가 21세기 인류를 이끌어갈 지침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에서의 상생은 그러나 다다르기가 결코 쉽지 않다. 광주·전남의 상생과 관련한 언론보도를 보면 더욱 그렇다. 광주군공항 이전이나 혁신도시 공동발전기금 조성 등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좀처럼 찾지 못하면서 이런 우려들이 자주 나오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안들은 결코 하루아침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사와 시장이 만나 한방에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주 멀리 있지도 않다. 지금 전남과 광주는 저마다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반드시 경계하고 지켜야할 금도라는 것도 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노력을 폄훼하거나 책임을 떠넘기지 말아야 한다.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말하는 순간 함께 도달해야 할 상생의 지점은 저만치 멀어진다. 더러는 이런 걸 기우라 말하기도 하고 또 더러는 꼭 필요한 인내라고도 한다.

모자 관계의 상생을 빌리자면 광주의 어머니는 전남이다. 광주가 전남에서 나왔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전남·광주의 상생은 그래서 인륜이고 천륜이고 필연이다. 도라지 위스키와 커피도 상생을 이루는 이 가을, 전남·광주의 상생도 익어갈 것을 믿는다.